“정통 서정과 형식 실험 사이에서 균형 잡을 것”
‘현대시학’ 새 주간 이재무 시인
세대간 단절 극복에 중점 두고 소설·영화 등 인접 장르와 소통
1969년 4월호로 창간되어 지난 12월호로 통권 537호를 기록한 국내 최장수 시 전문지 <현대시학>이 25년 만에 주간을 교체하는 등 대대적인 변신을 시도한다. 초대 주간이자 발행인이었던 전봉건 시인이 타계한 뒤인 1988년 8월호부터 주간을 맡아 온 정진규 시인이 12월호를 끝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이재무 시인이 새롭게 주간을 맡아 ‘<현대시학> 제3기’를 이끌게 되었다. 시인 공광규와 시인 겸 문학평론가 박현수 경북대 교수가 신임 편집위원으로 합류했다.
“유구한 전통을 지닌 대표적인 시 잡지의 주간을 새로 맡자니 어깨가 여간 무거운 게 아닙니다. 전임 주간들이었던 전봉건 선생님과 정진규 선생님이 쌓아 오신 업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동시에 법고창신의 정신으로 잡지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현대시학>의 새로운 보금자리인 서울 종로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9일 오후에 만난 이재무 신임 주간은 무엇보다 균형을 강조했다.
“과거 우리 시단이 좌와 우라는 이념적 지형에 따라 나뉘었다면 지금은 세대 간의 단절과 알력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젊은 시인들이 주도하는 과감한 형식 실험은 물론 의미가 없지 않지만 그것이 시의 전부인 양 통용되는 풍토에는 문제가 있어요. <현대시학>은 정통 서정과 형식 실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워낙 오랜 역사를 등에 지고 있기 때문인지 <현대시학>은 어쩐지 낡고 고루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주간은 그런 전통의 무게를 고스란히 감당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세대와 시대에 어울리는 변화와 혁신 역시 과감하게 시도하겠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시 잡지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려 합니다. 신작 시를 발표하고 시와 시집에 대한 해석을 곁들이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어요. 시 말고도 소설과 영화 등 인접 장르와 교섭하는 것은 물론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같은 동떨어진 분야와 시의 결합 및 소통 역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 보더라도 남이 쓴 시를 읽는 것보다는 아예 다른 분야의 독서나 문화적 체험에서 시 창작에 필요한 에너지를 더 얻게 되거든요.”
사반세기 만의 변신을 위해 <현대시학>은 1월호와 2월호를 건너뛰는 대신 3월호를 ‘혁신 합본호’로 내기로 했다. 합본호에는 소설가 이시백이 시를 소재로 해서 이야기를 구축하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이며, 이은봉 시인은 ‘내가 만난 시인들’이라는 이름으로 1970년대 이후 시단 풍경을 펼쳐 보이는 연재물을 시작한다. 천양희·배한봉·김성규 시인이 ‘<현대시학>에 바란다’는 글을 쓰기로 했고, 문학평론가 박슬기의 전봉건론과 전봉건의 대표시 그리고 사진과 연보를 실어 이 잡지를 창간한 전봉건에 대한 예우를 갖출 예정이다. 문학평론가 이숭원 서울여대 교수는 권두시론 필자로 합류한다. “4월호 이후에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대중음악 같은 다양한 분야와 시의 관계 그리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스타’ 대접을 받는 시인들이 참여하는 기획도 궁리 중”이라고 이 주간은 밝혔다.
“김구용 시인의 글씨인 한자 제호는 그대로 살리지만 표지 디자인은 아예 새롭게 할 생각입니다. 저희 잡지의 기획자문위원인 사진작가 황규태 선생의 사진으로 매호 표지를 꾸밀 생각이에요. 본문 글씨체와 디자인 역시 요즘 세대의 감각에 맞게 바꿀 예정이고요.”
지난 가을호와 겨울호로 종간하거나 무기한 휴간에 들어간 시 전문지들의 사례(<한겨레> 2013년 12월9일치 27면)에서 보듯 판매와 광고 수입만으로 시 잡지를 운영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이 주간은 “전봉건 선생의 유족이 잡지 제작비와 사무실 임대료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며 “당연한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모든 원고에는 반드시 원고료를 지급한다는 것이 우리의 원칙”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