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입니까?
나란 육신과 영의 합이 나 아닙니까?
육신의 움직임을 글로 써논것이 '소설'이며
영의 생각을 풀어놓은 것이 '시'이고
육과 영이 합하여 움직임을 써 놓은 것이 '수필'
아닙니까?
예전 본인이 이 엄청난 사실을 임샘께 수업시간에
고하였더니 개똥같은 소리 하지마라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저의 생각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제목을 '개똥철학'이라 써서 말입니다.
수화님의 글을 읽고 무릎을 탁쳤습니다.
표현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 내생각과 같은 생각을
많은 사람이 하구 있구나...
반가웠습니다.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랍니다.
그러면 새로운 삶이란 무엇인가?
알수없습니다. 전혀.
이제껏 우리가 알고있는 죽음에 관한 상식이
아닌 것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이겁니다.
알수없습니다. 그것이 정확한 답입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언어는 모두 인간들의 죽음을 위로하는
언어일뿐 실제가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쓰는 언어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어불성설 아닌가요?
죽음은 죽음의 언어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삶의 언어로는 표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명하신 성철스님께서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물으니
"살면서 삶이 어려워 이렇게 힘든데 어찌 죽음에대해
알겠느냐? 죽음은 죽고난 다음 다시 생각해 볼 것이다."
죽음이 이렇게 알수없으니 우리들은 죽음에 대해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하여 종교가 생겨난 것이고 믿음을 갖게 된것
이지요. 믿을수 없는 것을 믿는 것 믿음 말입니다.
얼마 전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습니다. 올리겠습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고 힘겨웠다.
그런 날 위로한다고 아내가 태국여행을 잡았다.
무엇이 바쁜지 가는 날도 비행기를 놓칠 뻔 했다.
우두둑둑하며 비행기가 지상을 차며 하늘로 날랐다.
좌로 우로 몇 번인가 움직이는데
이내 잠이 들었다.
아내가 도착했다며 나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뜨니 날씨가 더웠다.
잠들기 전에는 분명 겨울이었는데
잠을 깨고 나니 여름이다.
몸에서는 땀이 났다.
껴입었던 옷을 모두 벗었다.
언젠가,
나는 죽음이라는 긴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 때 또 어딘가에 도착하면 일어나라며 누가 날 깨우겠지
그는 분명 아내는 아닐 것인데
나를 깨우는 이는 누구이며
눈 비비며 일어나는 그곳은 과연 어떤 곳일까?
인간이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성의 개체이지만
그 한시성 때문에 매일 우울해 할 수는 없잖습니까?
다행히 망각이라는 장치가 있어 어떤 슬픔이나 괴로움, 고통까지도 잊혀지게 되고
살 때는 또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고 보면 그 안에서 희망, 즐거움, 행복 등을 느끼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김부조 시인의 <빈자리>를 읽던 아침
유동식으로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고 계신 어머니에 대한 슬픔이 차 올라
온 우주의 슬픔까지 다 짊어진 듯 우울했지만
오늘은 다른 일로 기분이 좋습니다.
어디서 돈이 조금 들어와 걱정했던 카드값을 무사히 메꿀수가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