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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했던 천사의 손    
글쓴이 : 이하재    20-11-15 16:19    조회 : 1,193
* 택시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세상 이야기 *

따뜻했던 천사의 손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바람도 없는 양지바른 언덕에 앉아 봄날의 햇볕을 쬐듯 내 손끝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온기는 얼었던 나의 가슴을 녹여주었다. 그 온기는 수십 년 세월이 흘렀어도 깔끔하게 가시지 않고 불씨처럼 살아나 우울한 날은 나를 외로 해 준다. 색바랜 잉크 자국을 더듬으며 그녀의 온기를 다시 느껴 본다.

 1973년 4월 20일 금요일 맑음
오후 7시가 좀 넘어 학교에서 돌아왔다. 교복을 벗고 신문을 읽을 때 왼쪽 팔꿈치의 감각이 이상했다. 피부가 두껍게 뭉쳐 있었는데 벗겨져 진물이 흘렀다. 그곳은 초등학교 때, 돌로 때를 밀었던 곳이다. 돌로 박박 문질렀지만 아프지 않았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서서히 검은 그림자가 침입하여 나의 몸속에서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치료 약을 먹은 지도 5년이 되었다. 많이 회복되어 고등학교에 진학도 했는데 상처가 돋다니 앞이 캄캄하다.
 며칠 동안 비가 내려 방바닥이 눅눅하였었다. 작은 엄마는 습기 찬 방을 말리려고 연탄불을 피웠다. 방바닥이 탈 정도였지만 나는 좋았다.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서였을까 아니면 교련시간에 낮은 포복으로 기어서 팔꿈치가 벗겨진 것일까 알 수 없다. 공포감이 밀려왔다. 내일이 생일인데, 휴학하고 싶다. 1년 동안 완전한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다 해도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고 열심히 공부도 하여 대학도 가고 싶다. 그러나 어디서 1년을 보낸단 말이냐. 모든 것이 막막한 노릇이다.

 1973년 4월 23일 월요일 흐린 후 비
상처를 싸매고 나섰다. 작은 엄마도 이웃집 아줌마도 왜 학교에 늦게 가느냐고 물었으나 그냥 늦었다고만 말하고 보건소에 갔다. 의사 선생님께 휴학하겠다고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학교생활도 그렇고 사회진출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구 모 병원에 가 주사를 맞도록 안내장을 써 주었다.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께 결석계를 냈다. 일주일 동안 두통으로 인하여 결석을 하겠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은 생각 외로 냉정하셨다. 꼬치꼬치 캐묻기라도 할까 걱정하였는데 아니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물어봐 주시기를 원했었는데 수업료는 언제 내느냐고 하셨다. 옆에 계시던 국어 선생님이 어데 아프냐고 물었다. 우물쭈물하다가 꾸벅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먼 훗날 아시리라 속으로만 말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일주일 동안 휴학한다고 작은 엄마한테 말하고는 나왔다. 비를 맞으며 어둠이 짙은 산길을 걸어 집에 오는 동안 지난 일들이 영화처럼 스쳐 갔다.

 4월 24일 화요일 비
계속 비가 내리다가 오후 늦게서야 개었다. 상처에 약을 바르면서 하루를 보냈다. 옷에 씻기고 진물이 흘러 효과를 보지 못한 것 같다. 나 자신도 모르게 화상을 입다니 기막힌 일이다. 너무 뜨거웠던 방바닥이 생각났다. 그렇다고 화상까지 입다니 병신은 병신이다. 몸이 타도 모르는 멍텅구리 바보 천치 병신 중의 병신이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개굴개굴 개구리가 글을 읽는다. 가갸 거겨 고교……. 논두렁을 베고 밤을 지새우던 그는 얼마나 울었을까.

 4월 26일 목요일 갬
아침 일찍 일어났다. 아직 뜸이 들지 않은 밥을 부엌에서 먹었다. 엄마는 점심으로 먹으라고 김밥과 인절미를 보자기에 싸서 작은 가방에 넣어 주었다. 아버지께서 내어주시는 5,500원을 들고 나섰다. 처음으로 낯선 땅 대구로 가는 길, 누구라도 같이 갔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다.
 마곡사에 도착했을 때 첫차는 떠났고 다음 차는 8시에 있었다. 오늘이 장날이라고 사람들이 많이 탔다. 공주에서 곧바로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면서 금남 여객 대전행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9시 40분, 공부할 시간에 교복을 입고 학교가 아닌 다른 곳을 다니는 일은 창피한 일이다. 얼마나 즐거운 여행이냐. 버스 안에서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대전에서 고속버스를 타려 했더니 시간적 여유가 없다. 역에 들어갔다. 부산행 특급열차가 바로 있어 표를 샀다. 대합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 초라하게 보였다. 다가왔다가 뒤로 사라지는 풍경들이 산골 소년에게 매우 낯설었다.
 2시간 30여 분이 지나서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몰려가는 쪽을 따라 역을 나왔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지 않으면 찾을 길이 막막해서 아깝지만 200원을 내고 목적지까지 갔다. 
 안내실에 보건소에서 받은 봉투를 보였더니 2층에 가보라고 하였다. 봉투에 적혀있는 서치균 선생님을 찾으니 시내에 나갔다고 밖에 나가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30분, 거의 한 시간을 복도에서 기다리자 들어오라고 했다. 다른 분이 손을 보자고 하였다. 나에게 창피는 없었다. 더욱이 타향이고 머뭇거릴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며칠간 묵을 수 있느냐고 하기에 숙박비가 없다고 했더니 치료하는데 빨리 될 줄 알았느냐고 귀찮은 듯 말했다. 실수했구나 하는 차에 혼자 왔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실망을 했는지 자기는 모르겠다고 간호사에게 서치균 선생님에게 가보라고 했다.
 3층 연구실로 따라갔다. 3층에서는 2층보다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누구에게 친절을 받을 몸은 아니지만 서치균 선생님 역시 다른 데로 안내해 주었다. 보호자도 없는 학생에게 마땅한 시술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는 그리로 가서 미스 김을 만나보라고 하였다. 공주보건소에서 써준 소개장은 이제 필요 없게 되었다.
 XX 선교회 물리 시험실, 나는 잘 못 알고 부속병원 내에서 찾아보았다. 없었다. 한 남자에게 물어보았더니 모른다고 하였다. 한 간호사에게 물어보았더니 모른다고 하였다. 또 다른 간호사에게 물었더니 억센 사투리로 자세히 일러주었다. 병원을 나와서 담장을 따라가니 한적한 곳에 XX 선교회가 있었다.
 선교회라면 의료기관은 아닐 것이다. 내가 기대를 했던 치료는 없었다. 사무실에는 25~8세 정도로 보이는 여자 혼자 있었다. 그녀는 달랐다. 톡톡 튀는 밝고 맑은 음성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의사들은 차가운 고무장갑을 끼고 내 손을 만지는데, 그녀는 맨손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진물이 흐르는 내 손을 요리조리 만져보고 여러 가지 증상을 물어보았다.
 미스 김은 5년 동안이나 환자들을 치료해 왔다고 하면서 누나 같이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동안의 설움이 북받쳐 올라 와락 안기어 울고 싶었다. 맨손으로 왼쪽 손의 여기저기를 누르면서 감각을 물어보고 성형수술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몇 가지 운동법을 가르쳐 주고는 자주 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면 살이 돋아 나올 가망성이 있다고 희망적인 말을 해주었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었다. 비록 말같이 살이 돋아나오는 기적은 없었지만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온기는 남아 나의 몸을 돌고 있다. 힘들 때는 또 찾아오라고 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손은 아직도 그대로일 것이다. 천사는 늙지 않으니까. 나는 아직 다른 사람의 손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지 못했다. 힘이 들거나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아무나 하는 일도 아니다. 마음이 따뜻한, 온정이 넘치는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사랑의 행위다. 찬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일까. 염치없게 그녀의 손길을 한 번 더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