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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쩌다가 시인이 되었는가 -2-    
글쓴이 : 이하재    21-09-18 12:22    조회 : 2,480
-2-
 “기사 양반, 요즘 경기가 어떻습니까? 경기가 좋고 나쁜지는 택시기사분들이 잘 아시는데….”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자랑거리가 있는 손님들은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온다.
 “오늘 많이 하셨어요?”
 나의 기분과는 상관 없이 친절하게 대답을 한다. 내 마음이 우울하다고 손님의 마음까지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 나는 택시 기사다.
 “예, 이제부터 많이 벌어야죠.”
 “몇 시까지 일하세요?”
 “요즘은 일찍 끝내요. 새벽 2시면 집에 들어 갑니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아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3시까지는 일을 했었다. 하루에 15시간은 꼬박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체력은 감소하고 노동의 시간도 줄어드는 것이 당연한 결과이기는 하다.
 손님은 정치에서 시작하고 자신의 살아온 과거, 열심히 살았다는 입지전적인 이야기를 대충 한 다음 자식의 자랑으로 이어진다.
 “기사님은 몇 남매나 두시었소?”
 그럴 때마다 나는 건성으로, 때로는 거짓으로 답을 하며 손님의 비위를 맞추어준다. 손님은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고 하면서도 자식 자랑을 이어간다. 본인이 열심히 돈을 벌어 뒷바라지했고 아들도 착하고 공부를 잘해 큰아들은 검사가, 둘째는 의사가 되었다는 식이다.
 “좋으시겠네요. 장하십니다. 훌륭한 자제분입니다. 요즘 세상에 그런 자식 드물죠.”
 대화하면서 운행하면 먼 거리를 지루하지 않게 이동할 수 있다.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은 다 하지 못해 아쉬움이 많을 것이다.
 “벌써 다 왔네. 기사님 고맙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나에게도 자식이 있다. 딸 하나와 아들 하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조합이다. 비록 단칸방에서 살았지만, 새끼들이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은 그랬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다른 세상을 알아가기 전까지는 끼니를 거르며 일을 해도 힘든 줄을 몰랐다. 언젠가는 남들처럼, 아니 남보다 더 잘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품에 있을 때만 자식이라고 했던가, 중학생이 된 후로는 부자간의 간격이 점점 벌어져갔다. 성장하는 과정이려니 하고 지켜보기만 하였다. 딸은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기도 하였는데 아들은 안 그랬다. 똑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성격은 달랐다. 언젠가 친구네 집은 부엌이 우리 집보다도 더 크다고 한 말이 나를 슬프게 하였다. 어린 마음에도 가난한 집구석을 친구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처지였지만 유치원 보내고, 피아노학원 보내고, 보습학원 보내고, 태권도학원 보내고, 보통의 아이들만큼은 뒷바라지했다. 학교에서 온 가정통신문은 늘 성격이 차분하고 매사에 모범적으로 장래가 촉망되니 지켜봐 주시라는 선생님의 당부 말씀이 있었다. 남에게 자랑할 일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흡족하고 행복 했었다.
 공부하는 환경과 조건에 따라 실력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공부방도 없고 저만의 책상도 없이 좋은 성적을 내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자식들 모두 지방대학으로 유학을 하였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의무는 몇 살까지인가. 대학생이면 성인이다. 자신들의 앞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나이다. 아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부모와 상의를 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편이었다. 내가 능력이 없어 남들처럼 뒷바라지를 못 해 주었으니 무엇을 부탁하고 의지할 마음도 없었을 거다. 때로는 그런 자식이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에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달에 한 번 음식을 싸 들고 면회 가는 일뿐이었다. 씩씩한 모습이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다. 제대하고는 휴학을 하고 등록금을 벌겠다고 공장에 취직하였다. 부모의 짐을 덜어 주겠다고 생각하는 게 기특했다.
 나는 친구들한테 자립심이 강한 아들이라고 자랑까지 했었는데 오래 가지 않았다. 다니던 공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지 알 수 없지만, 평소 명랑하던 아들이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대화하지 않고 시선도 피하였다. 우울한 모습이 보였다. 나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했다. 고민 없는 청춘이 어디 있으랴, 그저 지켜만 보았다.
 공장을 그만두고는 라식수술을 하였다. 시력 교정 수술을 하면 기분이 좋아질까 생각해 두말없이 하도록 했다. 안경은 벗었지만, 밤에는 빛이 반사된다고 만족스럽지 않은 눈치였다.
 몇 달 동안 편의점 아르바이트하고는 저 혼자 전국 일주 여행을 하였다. 휴학 중에 등록금을 모으겠다는 계획이 바뀌었나 보다.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행동하는 게 마땅치 않았지만 제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워오기만을 바랐다.
 군 제대 후 일 년이 십 년처럼 느껴졌다. 우울한 자식의 눈치만 보며 본인이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었다. 무엇인가를 부탁하면 나는 기뻤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내가 해주는 것이 좋았다. 용돈도 넉넉하지는 않았겠지만, 꼬박꼬박 통장에 입금해주었다.
 학교에 등록하고는 자취를 하겠다고 하였다. 딸처럼 아들도 전철을 타고 통학하기를 바랐지만 거절하지 못 하고 허락하였다. 대학교 2학년은 학교 근방에서 자취하며 마쳤다.
 겨울방학 동안에도 집과 자취방을 오가며 지냈다. 어쩌다 집에 같이 있을 때는 무엇이 불편한지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나를 의식적으로 피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 또한 아버지하고는 많은 대화가 없었었기에 이해하며 기다렸다.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내가 그랬던 것처럼 때가 되면은 변하리라 여기고 지켜만 보았다. 섣부른 대화는 갈등만 키우고 관계를 악화시킨다고 여겼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폭력이라도 써서 감정을 풀어내야 했었다.
 그날은 쉬는 날이라 집에 있었다. 밥을 먹자고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종일 대화 없이 한 집 안에 있는 것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재미없는 텔레비전만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내가 퇴근하고 돌아와서야 집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내는 피곤한 몸으로 두 사내의 저녁을 준비했다. 육식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먹이려고 오리고기를 사 왔다. 방 안에 처박혀 있던 아들은 갑자기 컴퓨터를 켜고 무언가를 인쇄하려 했다. 프린터기에 문제가 있는지 씩씩거리며 몇 차례 시도하였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잉크가 말랐을까.
 아들은 짜증 난 얼굴로 잉크를 충전하려는지 바쁘게 나갔다.
 “오늘 안 되면 내일 하면 되잖아.”
 “... ...”
 아들은 못 들은 척 찬바람을 일으키며 현관문을 닫고 나갔다. 집안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프라이팬 위에서는 오리고기가 맛있게 구워졌다. 나 혼자 꾸역꾸역 한 끼의 식사를 마쳤다.
 잉크를 충전해 온 아들은 인쇄를 마무리하고 혼자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제 엄마가 구워주는 오리고기를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
 “은창아! 반찬은 무얼 해줄까?”
 “... ...”
 “전에 가져간 것은 다 먹었니?”
 “... ...”
 “말 좀 해라!”
 “... ...”
 “너 그러면 엄마 너무 힘들어.”
 “... ...”
 아내는 참았던 눈물을 쏟으며 흐느껴 울었다. 아들이 제대 후 2년 동안 살얼음판 위를 걷듯 자식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모자간에는 가끔 대화도 있었는데 그날은 아니었다.
 나는 아들이 미웠다. 괘씸한 놈, 한심한 놈, 못난 놈, 소리라도 버럭 지르고 싶었으나 참았다.
 아들은 끝내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아니 엄마 아빠를 외면하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나오지 않았다.
 
 2012년 2월 24일 금요일 이른 아침 아내가 울부짖으며 나를 깨웠다. 나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라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들 은창아 어떡해 우리 아들”
 아내는 실성한 듯 왔다 갔다 어찌할 줄 모르고 발을 동동거렸다. 이 무슨 험악한 광경인가. “빨리 119에 전화 해”
 나는 축 늘어진 아들을 눕히고 가슴을 압박하며 깨어나라고 외쳤다. 가슴을 누를 때 차가운 공기만 새어 나왔다. 온기라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눈동자는 빛이 없고 혓바닥은 길게 입 밖으로 늘어지고 목에는 깊은 골이 파여져 있었다.
 입속에 더운 김을 넣어주려 입맞춤을 했을 때 차가운 느낌이 절망적으로 다가왔다. 눈을 감기고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가슴 압박을 하였다.
 119대원이 도착했다. 눈을 뒤집어 보고 가슴의 맥박을 측정해보고는 소생이 힘들다고 하였다. 경찰서에 신고를 대신해준다면서 전화를 했다. 곧바로 경찰차가 왔다.
 경찰은 타살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는 듯 아들의 몸을 살펴보았다.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는 경우라도 있는지 전후 사정을 꼬치꼬치 캐묻고는 장례식장을 안내해 주었다.
 아들은 새로 산 방한복을 놔두고 감색 운동복을 입은 몸으로 응급 차량에 실려 장례식장으로 이송되었다.
 형님과 동생들이 오고 친구 몇 명과 아들의 학교 동아리 친구들이 밤늦게 왔다. 나는 미소짓고 있는 아들의 사진을 보며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하룻밤 사이에 자식의 영정을 마주하다니 아내도 나도 훌쩍거리며 울기만 하였다.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나 보다. 먹은 것도 없는데 그치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2012년 2월 25일 아침, 외국에 취업 나갔던 딸이 도착하고 장례절차가 진행되었다. 입관하기 전에 아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삼베 수의를 입고 누워있는 아들, 병이나 사고사가 아니라 얼굴은 깨끗하고 평안해 보였다.
 세종시의 은하수공원에서 화장하였다. 은하수공원에 산골을 하려 했는데 논산시에 있는 지장정사에서 오신 스님이 절에 봉안당이 있으니 그곳에 안치했다가 사십구재를 하라고 권유를 하였다. 영혼이 있다면 사과하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얇은 나무 상자에 가루가 되어버린 아들을 담아 무릎 위에 앉히고 지장정사로 향했다.
 무릎냉증이 있었는데 아들의 체온이 전해져왔다. 찬바람이 느껴지도록 싸늘했던 자식의 마지막 선물이었을까 나의 무릎은 점점 뜨거워졌다.

 하나뿐인 나의 아들은, 돌멩이를 삼켜도 소화시킬 건강한 육신을 버리고 24살 짧은 생을 마감했다. 내가 젊은 시절 그러했듯이 고민하고 방황하다가 삶을 포기하였다.
 나는 아비의 자격이 없었다.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비를 대주고 용돈을 주면 되는 줄 알았다.
 내가 그렇게 가고 싶고 부러워했던 대학교도, 군대도 갔다 온 놈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서운했었다. 미웠다. 상처를 줄까 봐 애써 모른 척하고 철이 들기만을 기다렸었다.
 무관심으로 보였을 것이다. 꼭 안아주고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했어야 했다. 억지로라도 정신과 치료를 받게 했어야 했다.
 우울증은 누구나 겪으며 사는 정신적인 감기라고 생각했었다. 나도 세상을 원망하고 내 자신을 저주하고 꿈을 포기하고 체념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었다. 나는 용기가 없었다. 살다보면 좋은 날도 있기에 그냥 살았을 뿐이다.
 아들이 태어났을 때 나는 기뻤다. 어느날 나와 처음으로 눈을 맞추고 웃어주었을 때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함께 장난치고 뒹굴던 시절 나는 행복했었다. 인생은 불행한 것만이 아니란 걸 느끼게 해주었던 아들은 이제 없다.
 뉴스에는 연일 유명 연예인들과 청소년들의 자살소식이 보도 되었다. 나와 관련이 없을 때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던 뉴스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학교폭력은, 왕따는, 우울증 환자는 왜 그렇게 많아졌는지, 세상이 갑자기 변하기라도 했을까 우울한 소식들은 나를 더욱 우울하게 하였다.
 산업 현장에서, 여행길에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젊은이도 많다. 그때마다 죽은 자식을 살려내라고 몸부림치며 통곡하는 장면들을 보았다.
 천명을 다하지 못한 어느 죽음이 원통하고 서럽지 않을까마는 그 유가족들은 원망할 상대도 있고 같이 슬퍼해주고 위로해주는 사람도 있다. 심리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움도 주지 않는가. 
 자살자의 부모들은 모두 죄인이다. 원망하고 보상을 요구하거나 아픔을 하소연할 대상도 없다. 죽음을 방조한 죄인일 뿐이다. 간접 살인자, 친족 살인자이다.
 슬픔은 가슴에 묻고 삭여야만 한다. 가슴에 박힌 대못을 빼 줄 그 누구도 없다. 각자의 체질에 따라 빨리 빠지거나 영원히 박혀있거나 할 것이다. 내 가슴은 단단하게 뭉쳐져 있다. 단단한 응어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