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느려도 괜찮다 / 손도순
나에게는 요정이 있다. 여행 날짜만 정하면 그날은 어김없이 햇살이 비춘다. 며칠이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해도, 길을 나서는 그날은 하늘이 맑아진다. 누군가 내 마음을 아는 듯, 파란 하늘을 선물처럼 내미는 것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여천으로 가는 날. 어제의 먹구름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콘크리트 바닥 위로 그림자가 부드럽게 번졌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어깨 위엔 은빛 햇볕이 따뜻하게 내려앉았다.
들뜬 마음속에는 잔잔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친구는 작년에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항암 치료까지 마친 뒤 요양 중이었다. 여러 번 찾아가고 싶었지만, 친구는 쇠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며 몸이 조금 더 회복된 뒤에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이제, 괜찮아졌다는 소식에 조심스레 길을 나섰다.
플랫폼에 서 있는 순간, 익숙한 문구 하나가 마음에 떠올랐다. ‘시간 방향 플랫폼’. 삶의 모든 장면이 익숙한 화면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문제는 늘 사소한 데서 시작된다. 설레는 마음으로 플랫폼에 들어섰고, 도착한 KTX 열차에 별 의심 없이 몸을 실었다. 좌석 번호를 확인하며 자리를 찾았지만, 내가 앉을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예매한 건 일반실인데, 내가 탄 칸은 특실 2호 차였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스쳤고, 머릿속이 싸하게 식었다. 바로 그때, 익숙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탑승하신 열차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한마디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왜 열차 번호를 확인하라고 하는 걸까? 혹시, 설마…?
열차는 이미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당황한 나는 내릴 수 없었다. 승무원은 보이지 않았다. 약 5분 후, 승무원이 순회하며 나타났다. 나는 말 없이 표를 내밀었다. 승무원은 표를 보자마자 말했다.
“승객님, 열차 잘못 타셨네요.”
곧 발권 승무원을 보내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내가 타야 할 여천행 열차는 맞은편 플랫폼에서 출발했다. 두 열차는 종착역은 같지만, 하나는 서대전을 거치는 경유 열차였고, 내가 예매한 것은 직행열차였다. 단 3분 차이로 출발했고 외형도 똑같았다. 기차 번호만 달랐다. 플랫폼에는 분명 안내 방송도 있었지만, 나는 그 방송을 흘려들었다. 설마 이렇게 짧은 시차에 다른 열차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 작은 실수가 결국 나를 낯선 시간 속으로 이끌었다. 도착 시각은 27분 차이. 예매한 열차는 3분 늦게 출발했지만, 나는 엉뚱한 열차에 몸을 실은 것이다.
나의 감각이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자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쯤에서 눈치채고 뛰어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안내 방송에도 민감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왜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이 밀려왔다.
날이 갈수록 모든 것이 한 박자씩 늦어진다. 눈은 침침해지고, 귀는 익숙한 멜로디조차 허술하게 흘려보낸다. 손끝은 떨리고, 판단은 흐릿하다. 승무원은 괜찮다며 표를 취소하고 다시 발권하면 된다고 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환불 수수료가 발생했다. 결국, 표를 취소하고 새로운 열차로 다시 발권했다. 쓴맛이 가슴 깊숙이 번져왔다. 승무원은 “부산행이 아니어서 다행이네요”라며 웃었지만, 그 말조차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직 부산행과 전라선을 구분 못 할 정도는 아니야…’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서글펐다. 길을 잘못 들어서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작은 부주의 앞에서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것 하나도 제대로 못 하다니…”
달리는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사소한 착오는 종일 나를 침묵하게 했다. 풍경은 그대로인데,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흐른다.
셀프 발권기 앞에 서면, 사람 대신 기계가 나를 응시한다. 손끝 몇 번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이순이 넘은 나이 키오스크 앞에만 서면 손가락이 떨리고, 괜히 성격이 급해져 눈은 흐려진다. 마음은 얼어붙은 투명인간처럼 낯설기만 하다. 터치 반응이 늦으면, 뒷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혼자 여행할 일이 많아지는 요즘, 걱정이 앞선다.
감각이 느려지는 건 단지 노화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자꾸만 세상에서 밀려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밀려남은 마음에 작은 균열을 만든다. 기차를 잘못 탄 일은 단순한 우발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빠르게 흐르는 세상에서 조금씩 밀려나고 있다는 징조였다.
그래서 오늘도, 눈치를 보든 말든 기계 앞에 서서 용기를 내어본다. 세상의 변화는 익히기도 전에 번개처럼 쏟아진다. 사람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다음 세계로 이동한다. 나만 그 자리에 남아, 전광판의 글자를 한 자 한 자 읽고, 화면 속 안내를 곱씹으며 해석한다. 내 속도로 따라가기엔 벅차게 느껴질 때도 많다.
그래서 처음엔 새로운 것을 일부러 멀리했다. 잘 쓰던 전화기를 바꾸지 않았고, 익숙한 길만 걸었다.
어느 날 딸이 말했다. “엄마, 무조건 기계 앞에서 피하지만 말고 일단 부딪쳐 봐.”
그 말 한마디에 무장해제되듯, 처음으로 키오스크 앞에 당당히 서 보았다. 처음엔 더듬거렸고, 화면을 몇 번이나 되돌아봤다. 하지만 주문을 마치고 영수증이 출력되었을 때, 손끝에 작은 성취감이 전해졌다.
새로운 것을 멀리하기보다는, 조금 더디게 다가가기로 했다. 오늘도 나는 기계 앞에서 한 박자 느리게 숨을 고른다. 다시 나를 위한 속도로 세상에 적응해 나가고 있다. 처음이 힘들 뿐, 계속하다 보면 나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MBC 라디오 여성시대 양희은,김일중 입니다. 사연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