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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뱁새, 보첩여비(步?如飛)하다    
글쓴이 : 이형표    19-02-27 23:35    조회 : 6,079
   뱁새, 보첩여비(步?如飛)하다_이형표_201902.hwp (12.5K) [5] DATE : 2019-02-27 23:35:16


뱁새, 보첩여비(步?如飛)하다


                                                                                                                                                                이형표

   나는 아침마다 어떤 젊은이와 보이지 않는 무언의 실랑이를 벌인다. 그렇게 시작된 실랑이 같은 경쟁이 이제 두어 달을 넘어섰다. 오늘도 출근 시간에 숨을 헐근거리며 젊은이를 따라간다. , . 그러곤 녀석을 힐끗 쳐다본다. 그는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다리에 더욱 힘을 줘가면서 발을 재게 놀려보지만, 힘이 잔뜩 들어간 장딴지는 이제 마비가 될 것만 같다. 그래도 따라잡아야지! 팔을 부지런히 휘적거리며 걷고 있다. 오른쪽 발등 위 뼈마디가 욱신거리며 아파 온다.

 

   나는 매일 아침 지하철 8호선 장지역에서 내려 사무실까지 걸어간다. 근무하는 사무실이 문정역 근처지만 일부러 걷기 위해 미리 한 정거장 앞선 장지역에서 내려 걸어간다. 거리는 1.2킬로미터 정도. 이 거리를 십 분 만에 걷는다. 휴대폰 시계를 보고 출발 시간을 체크하고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착지 사무실 앞에서 다시 한번 시계를 확인하면 정확하게 십 분 정도 지나있다.

 

   장지역에서 백 미터 정도 걸으면 '가든 파이브' 건물 전방에 첫 번째 신호등이 나타난다. 신호등 초록 불빛이 쏟아지는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젊은이와의 경쟁은 시작된다. 똑같이 횡단보도를 건너지만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그는 훌쩍 십여 미터를 앞서간다. 어라, 이 녀석 봐라. 나는 부지런히 녀석의 발을 쳐다보며 뒤꽁무니를 바짝 뒤쫓고 있다. 마치 범인을 잡기 위해서 추격하는 형사의 심정이다. 녀석은 내가 얼추 계산해도 키가 190센티미터는 돼 보이는 큰 키의 소유자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 정도(?), 사회의 초년생답게 건장한 젊은이다.

 

   걸으면서 머리로는 부지런히 계산한다. 키가 20센티미터 더 크니까 걷는 보폭도 그 정도는 차이가 나지 않을까. 그러니 열 걸음만 걸어도 그와 나는 단순 계산으로 벌써 2미터의 간격이 생기는 것이다. 아하, 이것은 내가 부지런히 걸어도 따라잡을 수 없는 필연적인 거리로구나, 하고 생각을 한다. 그래도 그를 따라잡기 위해 더 재게 발을 놀린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서 같이 걷거나 앞서가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물리치거나 따라잡는다. 그러나 웬걸, 오른쪽 발등이 계속 아파오고 숨은 차오르고 팔은 더욱더 휘적거리게 되는 걸 어찌하랴.

 

   그러나 녀석을 따라잡을 기회는 있다. 그것은 두 번째 신호등이다. 빨간 불빛에 걸리면 그는 영락없이 멈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를 따라잡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때론 그가 녹색 신호등 불빛에 맞춰 먼저 건널 것 같으면 나도 녹색 신호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미리 열댓 보 정도를 헐레벌떡 뛰듯이 걷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나의 행동엔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씩씩하게 제 갈 길을 걸어간다. 그러니 나 혼자만 아득바득 용천 발광을 하는 셈이다. 이제 신호등은 없다. 부지런히 걸어서 각자 사무실로 가버리면 아쉽게도 게임은 끝난다. 허덕거리는 호흡에 맞춰 뒷덜미에는 제법 땀방울이 솟아 있다. 뿌듯하면서도 허전하다. 허전한 건 그를 저녁에는 만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걷기 얘기를 하다 보니, 불현듯 옛 군대 시절이 떠오른다. 사십 년 전 서해안의 어느 부대에서 보병으로 삼 년 가까이 국방의 의무를 때운 적이 있다. 보병들은 행군이나, 사격, 구보를 기본적으로 잘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보병의 기본 훈련을 무난하게 견뎌냈다. 보병들이 주로 하는 10킬로미터 완전군장 구보를 오십 분 안에 주파하기도 했다. 군장 무게만도 10킬로그램이 훨씬 넘었으니 어지간했을 것이다. 고참 병장 시절의 얘기이다. 한여름에 구보를 하면 더위 때문에 낙오하는 졸병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졸병의 군장을 내 군장 위에 짊어지고 총까지 받아들고도 거뜬히 오십 분 안에 10킬로미터를 소대 동료들과 함께 완주하곤 했었다. 보병부대에서 행군은 기본이어서 보통 4킬로미터를 오십 분간 걷고 십 분간 휴식하는데, 2회 왕복 100킬로미터 고된 행군도 거뜬히 견뎌냈다.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힘이 펄펄 솟을 것 같은 어쭙잖은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아침마다 1.2킬로미터를 십 분 만에 걷는 것을 군대식으로 계산하면 오십 분에 6킬로미터를 걷는 셈이니, 군대를 제대한 지 사십여 년이 지난 이 나이에는 제법 빠른 걸음이라 할 것이다. 아니, 스피드 워킹(Walking)인 셈인데, 한자성어로 보첩여비(步?如飛)이다. 다른 말로 질족(疾足)이다. 질족이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빨리 걷는 걸음이다. 그렇게 나는 듯이 빨리 걷는 걸음을 보첩여비라고 한다. 중국을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이끈 키 152센티미터의 덩샤오핑(鄧小平)도 매일 3킬로미터씩을 마치 공이 굴러가듯 속보를 즐겼다고 하니 좋은 운동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얼마 전부터는 젊은이도 나의 그런 모습을 눈치챈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때는 녀석이 보폭을 은근히 조절하면서 나를 골려준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장지역에서 내려서 사무실까지 걸어가는 주위환경이 너무나 좋다. 인도도 넓고 조형물이 아주 세련되고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조금 부연하자면, 내가 아침마다 걷는 문정동 일대는 송파구 내에서도 신도시로 불리는 곳이다. 문정동 지식산업단지라 불리는 이 일대는 새로 개발된 지역으로 동부지방법원 등 법조 단지가 조성되어 있고, 내진 설계로 지어진 신형 건물들이 우뚝우뚝 솟아있다. 내가 보기에 전에 강남역 근처에 근무했을 때 보다 더 깨끗하고 산뜻한 곳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저녁 출퇴근 길에는 젊은 사람들로 그 넓은 인도가 붐빈다. 그런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젊은 도시답게 싱싱함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침마다 그 젊은이가 은근히 기다려진다. 걸으면서 매일매일 그를 관찰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의 튼실한 두 다리를 바라보면서 따라 걷다 보면, 그의 복장이나 신발 등을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관찰한다. 그는 주로 긴 패딩 점퍼나 코트 종류를 좋아한다. 신발은 어느 때는 하얀 농구화를 신었다가 어느 날은 유행하는 목이 긴 군화 같은 것을 신기도 한다. 멋진 청바지를 입고 걷기도 한다. 그럴 때는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녀석의 굵은 허벅지 하며 튼실한 장딴지가 내심 부럽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겠지, 자위를 해 보기도 한다. 그런 내 모습을 누군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 저것 좀 보아!.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네. 쫄랑쫄랑 가랑이 찢어지겠어. 조롱 섞인 말들이 귓전을 마구 후려치는 듯하다. 쫄랑쫄랑 이라니. 내 키도 170센티미터인데, 이 정도면 예전엔 제법 큰 키에 속했다구. 큰소리도 쳐보지만 190센티미터 장정 앞에 누가 당할 손가.

 

   오늘은 젊은이의 표정이 보고 싶어졌다. 그의 헤어 스타일은 유행하는 연예인 남자 스타일을 닮았다. 요즘 인기 짱인 박보검이 하는 쉼표 머리스타일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쉼표 머리는 앞머리 모양이 쉼표 모양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가 어쩌면 포마드스타일인 것 같기도 하다. 일명 시상식 헤어 스타일이라고 할 정도로 시상식에서 남자 연예인들이 즐겨 하는 헤어 스타일 말이다. 오래전부터 김우빈이나, 유아인 같은 연예인들에게서 사랑받아온 스타일이다.

 

   어쨌든 젊은이는 연예인 뺨치는 스타일의 멋쟁이다. 오늘도 그와 파워 워킹 경쟁을 하면서 그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한다. 아니, 이 나이에 내가 안간힘을 쏟고 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그렇게 아침마다 숨을 헐떡거리며 녀석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나면, 다리는 살짝 아파도 파워 워킹 덕에 나는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한다. 그 녀석 덕분에 건강이 더 좋아진 느낌이다. 나와 같이 걷는 그는 내가 사무실에 다다를 무렵이면 옆 건물 사이로 슬쩍 사라져 가버린다. 아침마다 젊은이는 나의 은근한 짝사랑이다. 그는 어떤 운동선수보다도, 스포츠 강사보다도 내게는 아침의 경쟁자요, 진정한 건강 동반자인 셈이다. ?

 




이미정   19-03-03 21:31
    
재미있게 읽었고 일상인 소재가 흥미로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김성은   19-03-06 08:46
    
젊은이의 모습을 어쩜 이렇게 재밌게 묘사하셨는지요. 제목도 좋구요. 오랜만에 경쾌한 글. 잘 읽고갑니다.
박영화   19-03-13 12:51
    
정말 재밌어요. 제목을 보고 이게 뭘까... 했는데, ㅎㅎ
잘 읽었습니다. ^^
이형표   19-03-28 22:28
    
이미정 님, 김성은 작가님, 박영화 작가님! 답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의 졸고에 대한 과분하신 말씀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만사형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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