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강의실 >  창작합평
  나의 살던 고향은    
글쓴이 : 정용주    23-04-21 05:46    조회 : 1,226
   나의 살던 고향은_정용주.hwp (32.0K) [1] DATE : 2023-04-21 05:46:25

 “다음 정류장은 올림픽 공원 역입니다......”

녹음된 낭랑한 목소리의 안내방송을 듣자마자 버스 좌석에서 일어났다. 올림픽 공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하차할 뒷문 쪽에 이미 승객들이 몰려있어서 버스가 완전히 정차할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다가 사람들의 물결을 따라 겨우 내릴 수 있었다.

대학 졸업식 날 밤에 요란스럽게 함이 들어오고 일주일 후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과 한국, 태국을 오가며 살다 캐나다에 정착한 것이 2009년도. 캐나다 이민 후 한국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한 나라에서 또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이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이삿짐이라고 할 만한 것은 매번 큰 가방 한 두 개 정도 뿐이었다. 살림살이가 없어서일까, 이국에서의 집은 기숙사 같은 느낌일 뿐, 내 집이라는 애착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이곳을 찾은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유년시절을 돌이켜 보면 이상하게도 정말 아련한 느낌이 난다. 옛날 무성영화나 흑백영화를 볼 때 정말 저 시절 사람들은 저렇게 살았을까, 저렇게 입고 웃고 울고 생활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처럼 나도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떠오를 때면 그 한 장면 장면이 오래된 영화 속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나곤 했다. 내가 추억하는 장소가 실제로 그렇게 생겼고 또 그 떄의 희미한 장면들이 정말 있었던 일일까. 나이 먹어가면서 점점 더 궁금해지는 것을, 마침 한국을 방문하러 온 김에 다시 확인해 보고 싶어서 발길을 이쪽으로 향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좋은 추억은 기억 되는대로 남겨 놓는 게 바람직하다고들 말들 하지만, 나는 그 뿌리를 캐보기로 마음을 정한듯하다.

잠시 걸어가면 있는 공원 안내도 앞에 서서 궁리해 본다. 어디로 갈까?

올림픽 공원은 면적이 43만 8천 평이라고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감이 안와서 살펴보니 여의도 면적의 절반쯤 된다는 설명이 있다. 그렇게 넓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공원 중심부로부터 북서부 쪽까지 이어지는 공원 전체 부지의 절반 가까이의 영역을 몽촌토성이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부지에는 한국체육대학교와 서울체육고등학교, 그리고 실제 경기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1984년 올림픽공원을 착공하였는데, 공사 도중 토성 터와 유물들이 발굴되었고 이를 보존하기로 함에 따라 1986년 올림픽공원 안에 유적으로 존치되었다.

그런 사연을 안고 공원의 일부로 남아있는 몽촌토성. 바로 내가 태어난 곳이다. 지금은 올림픽 공원의 일부가 되었지만, 어릴 적 그곳은 서울의 외곽으로 한적한 언덕위에 자리 잡은 마을이었다. 마을 뒷산은 민둥산이어서 땅은 온통 붉은 빛을 띤 흙으로 덮여 있었는데 마치 주황벽돌을 가루로 빻아 놓은 듯 한 색깔이었다. 마을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주변에 다른 나무는 한그루도 없이 소나무는 외로이 서있었다. 어른들이 올라가면 혼난다! 고 하고, 나뭇가지에 각색의 천들이 걸려 있던 걸 보면 마을의 서낭나무가 아니었나 싶다.

나무 기둥의 아래쪽 잔가지들은 워낙 많은 손을 타서 매끈하게 다듬어져 잡을 데가 없었다. 잡을만한 가지는 손이 닿지 않아 나무에 오르기가 어려웠다. 어릴 적 내 키의 두 배 높이까지 기어오르면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고,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이 저 멀리까지 구불구불 나 있었다. 그 길 끝까지 내려가면 30분에 한 대씩 서울로 가는 버스가 오는 정류장이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냈던 집은 청기와로 지붕을 덮은 집이었다. 아빠는 아주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고 자수성가하신 분이다. 신혼 때 이곳에 새로 집을 지으셨다. 마당이 무척 넓어서 800평이고 건물은 자그마한 17평이다. 우리 집이 마을의 유일한 기와집이었다. 워낙 개발이 되지 않은 마을이었기에 우리 집을 지으면서 전봇대를 자비로 설치해 전기도 끌어 와야 할 정도였다. 마을 전체에 오직 2대만 있던 전화 중 한 대가 우리 집에 있었다. 자가용도 있고, 기사 아저씨도 있었다. 70년대 초였던 당시에는 자가로 운전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차 소유주는 운전기사를 고용하는 게 당연시되던 시절이다. 포장도로도 아닌 좁은 농로를 차가 지나올 때는 먼지구름이 뿌옇게 일어서 그때마다 우리는 아빠가 퇴근하시는구나하고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민둥산 옆자락 동네였지만, 그 속에서 우리 집 정원은 넓고 아름다웠다. 마당 한켠에 있는 펌프에 마중물을 넣고 찌걱찌걱 내리누르면 그 주둥이에선 두세 번 만에 시원한 물이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원에는 자목련 꽃송이가 어른 두 주먹만 한 것이 그렇게 탐스러울 수가 없다. 자연석의 사이사이에 진주홍 철쭉이 피면 그 촌스런 색깔이 벌인지 나비인지 온갖 곤충들을 유혹하고 어린 나의 눈길도 사로잡았다. 동네 친구들과 숨바꼭질 할 때면 조심성 없는 내 어린 몸은 장미가시에 여기저기 찔려 피를 보곤 했다. 장미가시에 찔리면 엄청 아픈 것은 물론이고, 그 아픔이 참 오래갔다. 외출하려고 대문 앞에서 사르비아를 따서 입으로 쪽쪽 빨며 엄마를 기다릴 때면, 어느새 마당은 내가 먹고버린 사르비아 꽃무덤이 수북했다.

엄마는 봉숭아꽃을 따다 손톱에 물을 들여 주셨다. 실로 너무 꽁꽁 치어매서 손가락은 무척 저려왔는데 참고 밤을 보내도 아침엔 색깔마저 김칫국물색이 되어 예쁘게 물들지 않았다. 이렇게 퉁퉁 부은 손가락은 손톱보다 손톱주변의 살에 더 진한 봉숭아물이 들어있었다. 잠이 든 뒤에는 그 손가락들이 아팠는지 손톱 주변에 감긴 비닐을 이로 뜯기 때문에 아침이면 그중 두어 개는 빠진 채로 잠을 깨었고 그 손가락들은 봉숭아물이 들다 말았다. 엄마는 아쉬워하며 그 손가락만 다시 물들이자고 하지만 나는 아프다는 생각에 하기 싫어 울곤 했다.

정원에는 그네도 있었고 미끄럼틀도 있었다. 철로 만들어진 그네는 양쪽에 의자가 있어 언니와 내가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놀 수 있는 알파벳 에이(A) 형태였다. 철판으로 만들어진 미끄럼틀도 있었지만 하루 종일 해가 내리쬐고 나면 엉덩이가 델 것처럼 뜨거워서 잘 타지 않게 되었다. 집에서 키우던 개가 새끼를 낳았을 때는 언니랑 나랑 각자 한 마리씩 안고 미끄럼을 태워줬는데, 그 하얗고 귀여운 강아지들은 동네 아줌마들이 한 마리씩 가져가서 젖을 떼고나면 며칠 만에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

개도 여러 마리도 키웠다. 셰퍼드, 도사견, 그리고 스피츠도 기억이 난다. 도사견에겐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덩치가 엄청나서 동네 아이들은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도 못했지만, 나는 도사견을 개집에서 끌어내고 바깥 나무에 묶어놓고 개집에 들어가서 소꿉놀이를 하곤 했다. 친구 5명과 함께 들어가서 소꿉놀이를 했던 기억이 날 정도니, 그 개집은 아마 지금도 성인 어른이 충분히 들어갈 크기가 아닌가 싶다.

이런 가물가물한 기억들은 40여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면서 정말 아련한 먼 옛날 추억으로 남아있었는데 올림픽 공원의 몽촌토성에 와보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꿈길을 걷는 듯 한 느낌이다. 나에게도 고향이 있었구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거나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로 시작되는 어린 시절 동요가 나에게도 정말 현실이었구나 싶다.

언니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우리 가족은 성동구 구의동으로 이사를 했고 그러면서 내 기억속의 고향 몽촌의 생활은 막을 내렸다. 그 집에는 외할아버지가 이사 오셔서 계속 사셨다고 하는데, 그나마 몇 년 뒤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거의 빈집이 되었다가 1984년 올림픽 공원을 착공하면서 올림픽 공원에 수용되었다. 그렇게 내 고향은 없어졌고 이제는 그 기억만 남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내 고향, 사라진 옛집이 있던 자리. 그 추억을 더 소환하고 싶은데 과연 어디로 가야할까? 공원 안내도를 몇 번씩 훑어 봐도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겠다. 백제시대의 토성 터는 국가적인 유적으로 보존되어 남아있지만 40 여 년 전에 내가 살던 집터는 자취 없이 사라진지 오래다. 아쉬운 마음에 한참을 더 봐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집에 돌아가서 몇 장 남은 그 시절 사진들을 보면서 기억을 되살려봐야겠다. 그러다 보면 오늘밤 꿈에서라도 커다란 개집에 들어가서 놀다가 목이 말라 마당의 펌프를 눌러서 찬물을 마시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정용주 님의 작품목록입니다.
전체게시물 4
번호 작  품  목  록 작가명 날짜 조회
공지 ★ 창작합평방 이용 안내 웹지기 02-05 80993
4 나의 살던 고향은 정용주 04-21 1227
3 내 인생의 Celebration 정용주 04-21 1201
2 엄마가 집을 나갔다 정용주 04-21 1057
1 킹콩의 기억 정용주 03-19 18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