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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흔이 남긴 평화    
글쓴이 : 이지영    23-07-18 16:40    조회 : 1,480
   상흔이 남긴 평화.hwp (89.0K) [0] DATE : 2023-07-18 16:40:42

상흔이 남긴 평화

                                                                                                                          이지영

 초여름으로 접어든 오월, 우장산 도서관에서 평화 역사 기행을 다녀왔다. 파주에 6.25 전쟁의 상흔이 있는 곳, 격전지였던 파주의 다양한 유적지를 답사하는 일정이었다.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프로그램 중 하나로 어떤 곳에 가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설레었다. 마침 날씨도 화창해 내리쬐는 햇살이 우리 기행을 반겨주는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차도 옆길로 5분 정도 걸어가 도착한 곳은 적성면 두포리 학살터였다. 마을에 사는 수많은 민간인이 인민군에게 희생당한 곳이었다. 비석에 반공투사 6.25 당시 희생되신 분이라고 새겨져 있고 그 이름이 빼곡히 새겨 있었다. 우리 일행은 호국 영령 되시어 조국 품에 영원하소서라는 추모비 문구와 한마음이 되어 잠시 묵념했다. 군인들도 인민군에 맞서 싸웠지만, 민간인들도 투사가 되어 맞섰구나! 나무에 앉아 있던 새들도 고요를 지켰다. 동행한 해설 강사에 따르면, 파주에 이런 민간인 학살터가 여럿 있는데, 희생된 민간인 수가 군인보다 더 많다고 한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는 평범한 농민들에게 왜 이런 비극을 안겨 주었을까?

 다음 방문지는 적성면 구읍리에 있는 칠중성이었다. 가는 길 버스 창밖에 여러 대의 탱크가 지나갔다. 서울에선 볼 수 없는 광경에 신기했다. 전쟁에서 저런 탱크가 무수히 출동했으리라. 칠중성은 해발 147m의 중성산 정상부와 그 남서쪽에 있는 해발 142m의 봉우리를 연결한다. 전체 둘레는 603m인데 산 정상부를 둘러서 쌓아 마치 산이 왕관을 쓴 형태로 보이는 태뫼식 산성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초기 군사요충지로 기록돼 있고 특히 7세기 전반에는 신라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항쟁하던 곳이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UN군으로 참전한 영국군 글로스터샤 연대가 설마리 전투에서 중공군 3만여 명을 맞아 혈전할 당시 C 중대가 배치되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칠중성을 오르는 길에 여기저기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 있었다. 전쟁으로 초토화되었을 땅에서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견디었을까? 전쟁이 끝나고 선조들이 폐허가 된 땅을 일구었듯, 꽃들도 책임을 다한 것처럼 보였다. 커다란 방공호 두 개를 지나자, 칠중성 정상에 다다랐다. 사방으로 시야가 트여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서울 침공을 저지하려고 영국군이 중공군과 싸웠던 역사의 현장에 서보았다. 칠중성 정상 가운데로 가자, 격전을 치르던 군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총성 소리가 울리는 것을 뒤로하고, 칠중성에서 약 2km가량 떨어진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 공원으로 갔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조금 더 살을 보탠다. 설마리 전투는 1951422~25일 파주 설마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승기를 잡은 연합군이 195010월 평양을 탈환했다.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의 시련이 시작되었다. 작전지역에 투입된 영국군 글로스타샤 연대는 10배에 달하는 중공군에 포위될 만큼 수세에 몰렸지만, 끝까지 지키려고 격전을 치렀다.

 이 전투는 중공군이 남하하는 것을 늦춰준 데 큰 의의가 있다. 혈전 끝에 60여 명만이 탈출에 성공했고, 500여 명이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영국군 제29여단 전체로는 1,3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추모 공원 한쪽으로 참전했던 영국군이 행군하는 조형물이 보였다. 7명의 영국군이 총을 들고 마치 청동색의 군복을 입은 것처럼 걷고 있었다. 그 옆엔 한국전에 참전한 16개 국가(영국, 미국, 캐나다, 콜롬비아,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터키)의 국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우방국가의 자유를 지켜주려고 우리나라에서 싸워준 파병국에 마음 깊이 고마움을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부대 이름을 딴 다리 글로스타샤교를 지났다. 그 아래는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영국 군인들이 저 계곡물을 건널 때, 어떤 생각을 하며 전투에 임했을까? 평화를 지키려는 마음이 있었으리라. 우리는 기념비 앞에 다다랐다. 일행 중 한 분이 정보를 주었다. 기념비가 원래 동굴 자리인데, 시신이 많아 그 안에 넣어서 막은 게 이렇게 되었다고. 많은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들어진 기념비 앞에 꽃바구니들이 있었다.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주신 분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영국군 추모 공원을 나와 교통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북한군/중국군 묘지에 도착했다. 이곳은 6·25전쟁에서 전사한 북한군과 중국군 유해, 6·25전쟁 이후 수습된 북한군 유해를 안장한 묘지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제네바 협약과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19966월에 묘지를 조성하였고, 총면적은 6,099m²(2,000)1 묘역과 2 묘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2 묘역에 안장되었던 중국군 유해 541구는 2014. 3. 28일부터 2016. 3. 31일까지 총 3회에 걸쳐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묘역을 둘러보니, 성인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의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들이 바닥에 납작하게 열 맞춰 누워 있었다. 비석 왼쪽 위에 북한군이라 쓰여있고, 오른쪽엔 연도가 새겨 있는데 시신 발굴 날짜라고 한다. 가운데는 이름이 무명인으로 돼 있다. 그 아래쪽엔 강원도, 전라남도 등 발굴한 지역이 새겨 있다.

 어느 중국군 비석 앞에 중국어가 쓰여 있는 술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목숨을 잃은 중국군 가족이 생사를 알 수 없어 여기, 이 먼 곳까지 찾아왔을까. 일행 중 한 명은 예전에 한 번 온 적이 있는데, 함께 왔던 단체가 살풀이했다고 한다. 상을 차려놓고 무속인들과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그 의식이 행해졌다는 장소를 바라보며, 희생되신 분들의 넋이 위로받았기를 바랐다. 그리고 북한군, 중국군 모두 고국의 품으로 돌아가는 날이 꼭 오기를 기도했다.

 파주 역사 기행을 통해 일상 뒤에 숨겨진 평화를 보았다. 평화를 지켜준 분들의 헌신과 희생, 상처로 만들어진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 이번 기행으로 6·25전쟁을 돌아보았다. 전쟁이 발발한 배경을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미국과 구소련 대결에서 희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우리나라는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에서 해방됐다. 그 후, 카이로 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미국, 소련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분단이 되었다. 지금까지 한 나라가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적이 된 채 살고 있다. 이 비극적인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유적지 방문을 마무리하면서 한 문장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언제 휴전협정을 끝내고 통일된 나라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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