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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려온 텃밭, 화수분    
글쓴이 : 이필자    23-11-28 17:44    조회 : 1,606
   빌려온 텃밭, 화수분.hwp (30.5K) [0] DATE : 2023-11-28 17:44:24

             빌려 온 텃밭, 화수분

 시골이 고향이라고 다 전원생활을 그리워하고, 텃밭을 갖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언제나 그리운 고향 산천, 내 고향 문경에서 텃밭을 가꾸면서 살고 싶다. 현실은 그 희망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어느덧 자신과 타협하고 있다. 나이 들면 친구가 옆에 있어야 하고, 병원, 종교시설, 문화 시설 다 가까워야 한다면서 또 하나의 구실을 찾는다.

 그런 내게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아쉬움에서 벗어날 기회가 생겼다. 지인 밭 끝머리에 농사를 지었다. 내 꿈을 이룬 것 같아 열심히 했다. 산허리에 있고, 문이 자주 잠겨있어 출입이 불편했다. 얼마 후, 주인 이사로 끝이 났다. 잠시나마 행복했다.


 우연한 기회에 텃밭과 전원주택을 가진 성당 자매가 농사짓고 싶다는 나의 말을 흔쾌히 허락했다. 대문 밖에 밭이 있고, 집에서도 더 가깝다. 도서관 옆이라 오가는 길에 책도 반납하고 정말 잘되었다. 그 자리서 바로 하겠다고 하였다.


 작년에는 내가 좋아하는 상추, 고추, 시금치, 오이, 가지, 토마토 등 골고루 파종했다. 밭을 갖게 되면 제일 먼저 도라지를 심어보고 싶었다. ‘영원한 사랑’의 꽃말인 도라지, 귀족적이고, 단아한 보라색 꽃과 백색의 화려한 꽃은 나를 끌어당겼다. 밭 주인은 몇 번이나 실패했다고 하지만, 내가 우겨서 또 한 번 파종했다. 씨앗도 다른 거보다 더 비싸다. 두 집 다 싹은 보이지 않는다.

 도라지는 3월 중순에서 하순, 10월 하순에서 11월 상순에 파종해야 한다. 너비 90cm의 두둑을 만들고 종자를 고르게 뿌리기 위하여 삼사 배의 톱밥이나 가는 모래와 잘 혼합하여 뿌려야 한다. 파종이 끝나면 얇게 복토하거나, 볏짚을 덮고 물을 넉넉히 주어야 한다. 충분한 밑거름은 필수였다. 도라지 종자의 수명은 일 년이라서 종자도 잘 살펴보고 해야 한다. 그냥 종묘상 주인이 주는 대로 뿌렸다. 물론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물에서 숭늉 찾는 급한 성격, 그저 아름답다고 씨만 뿌리면 다 자랄 것이라는 나의 우매함을 후려치게 한 좋은 경험이었다. 도라지는 일단 좀 더 우직한 농부가 되면 하자고 접어 두었다.

 작년 봄에는 아삭거리는 상추를 수확해서 상추 배달꾼이 되었다. 고추는 열리는 쪽쪽 붉어지기도 전에 따서 풋고추를 먹고, 이웃에 나눠 주었다. 주인은 붉은 고추는 더 햇살을 받아 고춧가루를 하라고 한다. 아뿔싸, 그걸 몰랐네. 이젠 풋고추는 끝이다. 첫 해 농사에 고춧가루 두 근을 수확했다. 작년엔 고춧가루를 사지 않았다.

 

 올해는 더 야심 차게 시작했다. 토요일 아침 6시 30분은 텃밭에 가는 시간이다. 집에 있는 토요일 아침은 내게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아침기도 마치고 부리나케 삶은 계란, 사과 반 개, 우유 한 잔으로 대충 요기를 한다. 모기와 싸울 완전무장을 하고 밭으로 향하는 즐거움은 어린 시절 소풍 가는 기분이랄까? 고추 모종 30포기, 가지 5포기, 쑥갓, 토마토 5포기, 상추 등으로 올해 농사를 시작했다.

 

 토요일이 기다려진다. 낙동강, 김해 공항까지 훤히 보이는 높은 자락에 있는 밭이라 일주일 동안의 삶의 무게도 훨훨 날려 보내고 잊을 수 있는 것은 덤이다. 한 주가 지나면 파란 고추는 붉게 변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자연은 내게 그저 주기만 한다. 모진 겨울을 견디고 나온 향긋한 쑥, 돌나물, 울릉도 취나물, 깻잎, 고사리, 방아잎 등은 봄의 입맛을 한층 돋우어 준다.

 나눠 줄 만큼의 고추를 따서 각종 푸성귀를 봉다리 봉다리 챙겨서 생각나는 사람들한테 전화 한다. 가지와 땡초를 유난히 좋아하는 친구, 식사 때마다 상추를 찾는 성당 자매들한테.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배달을 시작한다. 갓 잡은 생선이 아닌, 갓 뜯은 야채를 가지고 간다. 가끔은 아침까지 해결하고 오기도 한다. 집에 와서 씻고 나면 다시 나가기 싫어진다.

 

 오늘은 올해 농사를 갈무리하고, 내년을 준비했다. 두 번에 걸쳐 뿌린 상추는 파릇파릇 잘도 올라오더니, 가을 가뭄에 누런 떡잎이 되었다. 게으른 주인 만나 시들 거리며 가버린 상추에 미안했다. 결국은 어제 오후에 밭 주인이랑 구포장 가서 상추 모종과 거름을 샀다.

 이 밭은 다 좋은데 한 가지가 우리를 힘들게 한다. 산 밑에 별장처럼 지은 집이라 76개의 계단 옆에 밭이 있다. 평소엔 운동 삼아 간다고 좋아하지만, 20kg 거름 포대 들고 갈 때는 정말 그놈의 포대 계단에 집어 던지고 싶기도 하다.

“우리 왜 이 짓하지? 씨앗 값도 안 나오는데, 야채 몇 푼 한다고 고마 사 먹으면 되지.”

구시렁대며 웃는다.


 남은 가지 다섯 포기는 마지막까지 다 내어 주었다. 아직도 주고 있는 고마운 가지다. 여나 무게 달린 가지도 마저 땄다. 어린 가지는 마음이 좀 아리지만 할 수 없다. 뽑기도 전에 그 가지는 옷에 쓱싹 하고는 내 입으로 들어간다. 맛으로인지, 영양으로인지 생각도 없이 순식간에 먹고 말았다. 덜적지근한 그 맛 또한 일품이다. 나눠주고 남은 가지는 듬성듬성 썰어서 건조기에 말린다. 정월 대보름에 나물로 먹을 것이다. 새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가지는 버릴 게 없다. 가지 꼭지도 햇볕에 잘 말려 두었다. 철분, 칼륨, 칼슘, 마그네슘 등 다양한 미네랄이 함유되어, 고혈압, 감염병 예방, 근육 손상 완화, 혈액순환 개선 등 좋지 않은 데가 없다.

 가지도 다 뽑고, 내년을 위해 시금치 씨를 뿌리고, 양파 심을 땅을 다져놓았다. 76계단을 열심히 오르내리면서 물을 주고, 잘 자라라고 속삭였다. 옆에 있는 주인 밭의 파, 배추, 무에도 물을 준다. 실은 주인장이 76계단에서 몇 번이나 사고가 나서 아직도 다리를 절뚝거린다. 갖가지 야채는 10월 바람에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살랑거린다. 물을 줘서 고맙다는 인사겠지?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먹는 밥은 꿀맛이다. 지난주에 따 놓은 토마토를 살짝 익혀 주스 만든다고 불에 올려놓고 밥을 먹었다. 그놈의 꿀맛 덕분에 토마토는 냄비 안에서 주스가 다 되었다. 그래도 좋다.

 

 텃밭은 내게 건강을 주고, 나눔을 준다. 그들은 공들인 만큼 거둔다는 진실과 살면서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여유도 주었다. 그러면서 푸성귀 한 잎의 소중함도 알았다. 남들은 쉽게 버리지만 난 마구 버릴 수가 없다. 몸이 허락하는 한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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