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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뺨 맞던 아이들    
글쓴이 : 박해원    23-12-27 19:05    조회 : 1,010
   뺨 맞던 아이들.hwp (97.5K) [1] DATE : 2023-12-27 19:20:01

뺨 맞던 아이들

       박해원

 

1960년대 후반 국민학교(초등학교) 저학년으로 기억한다. 땅끝마을 해남이라는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엔 가정환경조사가 있었다. 집안에 돈이 될만한 것들을 세세하게 조사했다. 텔레비전 있는 사람은 한 반에 한두 명에 불과했고 전화도 귀한 시대였다. 가정환경조사 규정에 없는 담임선생님의 호기심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조사한 때도 있었을 것이다. 소나 돼지가 몇 마리 있는지도 조사했고 아버지 직업도 조사했다. 집안 형제들 5명 이상, 10명 이상 손들라 했고, 대수라는 친구는 자기 집엔 닭도 있고 토끼도 있다고 했을 때 어린 내 생각에도 조금은 우스꽝스러웠다. 형제가 12명이라고 손들었던 친구는 자기 엄마는 계속 아이만 낳는다며 얼마 전에 또 동생을 낳았다고 푸념을 했다. 어떤 반 선생님은 엄마가 계모인 사람도 손들라 했단다. 그런 가정환경 조사라는 것들이 가난한 우리의 마음에 더 큰 아픔과 상처였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지금 현실에서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다. 순희 아버지는 두 명의 부인과 한집에 함께 살았다. 순희는 두 번째 부인의 딸이었다. 나의 눈에 비친 두 여인은 형님 동생 하며 비교적 화목해 보였지만 한 남자를 지아비로 두고 살아야 하는 두 여자의 마음이 어찌 평안할 수 있었을까.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1950년대에는 월사금, 사친회비였던 것이, 60년대에는 기성회비로 바뀌었고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70년대에는 육성회비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런 아련했던 시절 육성회비가 650원이었다. 이른 아침 수철이 엄마가 우리 집 대문밖에서 해원아!” 하며 내 이름을 외쳤지만, 엄마를 부르는 거다. 수철이 엄마는 아무도 관심 없는 용철이가 사고를 쳤다는 얘길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결국 수철이 육성회비를 빌려 가기 위한 너스레라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엄마는 백 원짜리 지폐 10장을 엄지손가락에 침을 발라 한 장씩 넘기며 두 번 확인하고 여기, 천 원, 확인해 봐요.” 하며 제철이 엄마에게 건넸다. 제철이 엄마는 엄마가 건넨 돈을 확인하는 대신 용철이 놈 때문에 집안에 돈이 씨가 마른다며 오히려 착하고 순진한 용철을 한 번 더 악역 배우로 등장시켰다. 그런 어미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고마워요! 다음 달까지는 꼭 갚으리다.” 두세 번 머리를 깊게 조아리더니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은 늘 그렇게 뭔가 숨기려다 들킨 죄인처럼 주눅이 들어 있었다.

곧바로 순번을 기다렸다는 듯이 연숙이 엄마가 꼬리를 물고 들어왔다. 두 여자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같은 처지의 전우애 같은 심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연숙이가 육성회비 못 내서 3일째 학교 안 가고 울고 있다며 조금만이라도 빌려 달라고 했다. 엄마는 우리 집 애들도 육성회비 내야 한다며 한 발 뺀다. 연숙이 엄마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기세였다. 엄마는 그녀의 눈물에 비친 애절한 마음을 차마 거절을 못 한 채 한숨을 몰아쉬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얼마 전에 중학교에 입학한 미자네 둘째 오빠가 교복을 입은 채로 들어왔다. “아짐!” 엄마를 불렀다.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다. “아버지가 엄마를 때려서 엄마가 쓰러져 누워있어요.” 그 오빠의 눈에는 벌써 그렁그렁한 궁핍의 눈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옷소매로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지만 벌써 턱밑에 달린 물방울은 설움을 가득 담은 큰 소리로 느껴졌다. 엄만 혀를 차며 애들이 무슨 죄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아버지가 또 술 잡수셨니?” 했다. 원석 오빠는 대답 대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의 부모님이 왜 싸우셨는지 안다. 뻔하다. 돈 때문이었으리라. 엄마는 원석에게 등록금이 얼마냐고 물었다. “오늘은 돈이 없으니 다음 주쯤에 너희 엄마께 오시라고 하렴.” 했다. 엄마는 아마도 돈을 빌려주는 거라서 어린 원석이 보다는 어른에게 직접 빌려주려고 했거나, 정말 돈이 없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 집은 육성회비 내는 기간에 동네 사람들이 어김없이 돈을 빌리러 왔다. 당시 아버지는 치과를 하셨기에 현금은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6남매 자식들보다 남의 형편에 더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였을 때 난 엄마에게 부아가 나기도 했다. 매번 육성회비를 빌려주는 엄마가 싫었다. 빌려준 돈을 받아서 쓰면 엄마가 굳이 남의 집 농사 품앗이를 안 하여도 될 터였다. 엄마는 너무나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고, 나중에야 이모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등록금은 그렇게 힘에 겹도록 빌려주었나 싶다.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언제나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엄만 그렇게 봄날의 따뜻한 햇볕 같은 삶을 사시다가 가셨다.

 연숙 언니는 결국 육성회비를 낼 형편이 못되어 초등학교도 졸업 못 한 채 서울로 상경했다. 가난 때문에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없었던 운명, 아직은 엄마의 보호를 받아야 할 어린 소녀의 마음은 얼마나 시리고 아팠을까. 연숙 엄마는 우리 딸이 서울 가서 돈을 엄청나게 잘 번다고 했다. 매월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비도 하고 동생들 육성회비도 밀리지 않는단다. 역시 딸은 살림 밑천이라며 연숙 엄마의 철없는 자식 자랑은 어딘지 모르게 돈을 빌리러 다녔던 설움을 보복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어린 내가 듣기에도 가시가 돋쳤다.

정식 선배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육성회비를 석 달째 못 가져가서 반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께 뺨을 맞았다. 너무나 큰 모욕감과 수치심에 3층 교실 창문을 뛰어내려 죽고 싶었단다. 열두 살 꼬마 인생의 비통한 심정은 어떠했을까. 정식 선배는 추억처럼 말하고는 있지만 50년이 훨씬 지난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은 커다란 상처라고 했다.

철주 이야기다. 돈이 없으면 집에 있던지 구걸이라도 해서 돈을 가져오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 철주는 살기 어린 눈으로 선생님을 노려보다가 뺨을 맞았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지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죄인처럼 비굴한 삶에 비관하여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었다. 육성회비를 가져오지 않은 아이들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교실에 들여보내지 않고 복도에 서 있게 했다. 그것은 그나마 신사적인 처벌이었다. 여자아이들은 팔 안쪽 살을 꼬집어 비틀면 살점이 떨어질 만큼 아팠다고 했다. 너무나도 아파서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육성회비를 못 낸 크나큰 잘못을 저지른 죄인의 심정으로 울음을 삼켰다.

학교에서 쫓겨난 영호는 집에 가도 돈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집에 가지 않았다. 산등성이에 올라가서 미친 사람처럼 울분을 터트리며 울었다. 이렇게 처참하게 사는 주제에 왜 자신을 낳았는지 부모를 원망하다가, 선생님을 저주하기도 하고, 발가락에 피멍이 들도록 돌부리를 걷어차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남아서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다닌 학교생활은 무엇 하나 소홀할 수 없었다. 절체절명의 가난한 환경에 처한 아이들이 학교에 다닌다는 건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것을 견디어 이루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공부를 하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그들은 이 땅에 386세대라는 새로운 신조어를 탄생시켰고 당당히 이 나라를 세계시장의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문맹에서 문명으로 선진문화로 이끈 주역들이 되었다.

선생님이 그토록 모질게 했던 이유를 들어보면 선생님에게도 아픈 사연들이 많았다. 학교장은 선생님의 고가점수를 육성회비 납부 실적으로 주었고 심하면 선생님 월급에서 공제한다는 협박을 당하기도 했단다. 치열한 현실 앞에서 선생님들도 어쩔 수 없이 모질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뼈아픈 가난한 환경 속에서 선생님이 육성회비를 내주어서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는 재훈이의 가슴 훈훈한 얘기도 있었다.

선생님께 뺨을 맞고 죽고 싶었다던 정식 오빠는 법무사가 되어 대기업을 거래처로 활발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발가락에 피멍이 들도록 돌부리를 걷어차며 울분을 터트렸던 영호는 화장품 제조를 하는 중소기업의 사장이 되었다. 초등학교도 졸업 못 한 채 서울로 상경한 연숙 언니는 공장 다니며 독학으로 야간고등학교를 진학했고 패션디자인학원에서 공부를 마친 후 의류업을 하며 멋지고 당당하게 살고 있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계속 학업을 유지할 수 있었던 재훈은 대기업의 임원으로 정년까지 일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선택할 수 없었다. 숱한 상처에도 꺾이지 않고 살아낸 아이들, 굳은살 덮인 흉터가 이제는 아프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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