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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버스의 마력    
글쓴이 : 이필자    24-02-22 22:16    조회 : 2,115
   마을버스의 마력.hwp (17.0K) [0] DATE : 2024-02-22 22:20:21

        마을버스의 마력

 

 살면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6일간의 연휴, 작년 추석이었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사람, 많은 것들 앞에 마냥 설렜다. 오빠도 없는 친정 올케언니가 문득 보고 싶었다. 코로나로 인해 이사 간 지 몇 년이 되었는데도 가보지도 못했다.

 

 어떻게 갈까? 대중교통, 자차이용 고민하다가 떡비가 남기고 간 가을 하늘도 보면서, 사람 사는 소리도 듣고 싶어 버스를 타기로 했다. 지하철은 밖을 볼 수 없고, 땅속으로 달리는 게 싫어서 평소에도 급한 일 아니면 잘 이용하지 않는다. 동래역 4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6-1번을 타라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마을버스다. 뒷골목, 산복도로, 아직도 남아 있는 골목 속의 주택들, 구석구석 숨겨진 모습까지 볼 수 있는 마을버스는 언제부터인가 나의 골목 여행 동반자가 되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 듯한 느낌도 좋다.

 

 동래의 중심지인 메가마트, 대동병원을 지나는 큰길로만 늘 다녔다. 지하철 동래역 4번 출구에서 출발해서 센텀 롯데 캐슬 2차까지 가는 동래구 마을버스 6-1. ! 첫눈에 30대로 보이는 젊고, 친절한 기사가 신선했다. 왠지 든든하고, 멋있어 보인다. 택시를 타면 내리고 싶을 정도로 할아버지 호칭이 걸맞은 기사로 인해 내릴 때까지 약간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202312월 기준 서울시 개인택시 기사 평균연령은 64.6, 법인 택시 기사는 63.1세라고 하니 불안한 게 무리는 아니다.


 버스는 동래 중심에서 점점 벗어나서 골목으로 들어간다. 명륜초등학교를 시작으로 동래시장, 동래고등학교를 지난다. 사춘기 조카랑 함께 걸었던 그 길, 참 소박한 길이고 정겨운 이름들이다. 동래시장을 지나 동래 교육청 후문이라고 한다. 평소 정문으로 주로 다녀서 후문은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명장초등학교, 명장 시장을 지나 명장동 새마을 금고가 보인다. 다른 금고보다 더 넓은 마당을 이번 명절에 무료 개방한다는 현수막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심각한 주차난으로 불상사도 생기는 요즘, 나에게 미소를 선물했다. 주택 밀집 지역 골목이라 좋은 발상이다. 골목길이 아니면 보기 힘든 모습이겠지.


 한참을 가니, 대한민국 사적 273, 가야-신라시대의 무덤군인 복천동 고분군 입구를 지난다. 고분군이 발굴 조사되기 전까지는 625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다행히 제대로 된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라 대충 지은 판잣집이었기에 땅을 깊게 파지 않아서 땅속 유적이 파괴되는 걸 피할 수 있었다. 이것도 결국은 뒷골목 덕분이 아닌가?

아니, 아이들 어렸을 때, 역사 공부한다고 왔던 곳이 이곳이란 말인가.’

그때는 정문으로 갔기에 지금 이곳이 더 낯설어 보인다. 어린 시절 아이들 모습이 새삼 그립다. 그 아이들은 세상 밖으로 나가 이젠, 여기에 온 기억조차 아련할 것이다.


 시장길을 지나 아파트 숲으로 들어간다. 남의 아파트 조경, 사는 모습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30년을 같은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나로서는 동래의 옛 명성과 떠오르는 해운대구 아파트 속살을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순천만 국가 정원을 연상케 하는 멋진 조경과 최신 운동기구, 휴식 공간들에 한순간 부러움을 샀다. 갈수록 점점 더 많아지는 도심의 아파트 숲에 숨 막힐 지경이다. 이리 많은 아파트에 내 집이 없어 천막 같은 집에 사는 사람, 집이 없어 집이 비싸 결혼을 못하는 이 시대 청춘들의 모습이 스쳐 간다. 걱정이다.

아파트 천지에 혼란해진 나의 눈으로 인해 결국 한 정거장 전에 내렸다. 기다리다 지친 올케언니 전화에 한 바탕 웃고서 마중 나온 언니와 같이 걸었다. 오빠가 살았으면 이 길이 이리 쓸쓸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주 그립고 그립다.

 

 차려놓은 소담스러운 밥상이 엄마 얼굴로 보인다. 결혼 전에 같이 살아서 내 혀가 기억하는 감칠맛 나는 음식 먹으면서 남편 없이 사는 얘기 촉촉한 눈물과 함께한다. 잘 자란 딸은 S대 교수로 안식년이라 미국에 있어 손자들 보는 소소한 행복마저도 사라졌다고 한다.

 오랜만에 왔다고 저녁 먹고 자고 가라는 손을 뿌리치고, 해지기 전에 간다며 나왔다. 갖은 반찬 다 싸준 열두 봉지 가슴에 품고 종점에서 출발하는 6-1번 마을버스를 타려고 서둘렀다. 아까 놓친 곳을 보고 싶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반가운 버스보다, 홀로 석양을 향해 가고 있는 언니에게 흐르는 눈물 감추려고 서둘러 버스에 올라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반대로 가면서 거꾸로 생각했다. 앞모습만 보면서, 보이는 것만 보면서 살아오지 않았는지.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진정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한다.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백양산 자락에 있었던 형제 복지원이다. 88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다는 명목으로, 앞모습을 아름답게 한다는 명분으로 갖은 악행을 일삼은 곳이다. 삶에 지친 사람들, 인생살이 감당하기 힘들어 공원에 잠든 사람들, 집으로 가는 아이, 엄마 심부름 가는 아이 강제로 잡아 가두어 감당할 수 없는 노역, 굶주림으로 죽게 한 곳이다. 657명의 사망자, 몸과 마음이 다 병든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소리 없는 비명이 형제복지원 자리 앞 큰길을 지날 때마다 아직도 맴돈다.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이들은 여전히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있다. 이게 진정 앞모습의 아름다움인가 생각해 본다.


 돌아가는 길은 장산에서 내려오는 산그림자만큼이나 근중했다. 나는 어떤 뒷모습일까? 타인의 고통을 통하여 자기 행복을 확인하지는 않았는지? 자녀들의 안부를 물으며 내 자식의 사회적 명함을 빌미로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과거와 타인은 바꿀 수 없어도 미래와 자신은 바꿀 수 있다. 산도, 인생도 내리막길이 중요하다. 아직 늦지 않았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나를 되돌아보고, 나의 뒷모습까지 생각하게 한 오늘의 6-1번 마을버스는 마력 같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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