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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땡땡이    
글쓴이 : 곽지원    24-07-29 10:19    조회 : 2,357

땡땡이

 

 곽지원

 

 고등학교 때까지는 모범생이었다. 나에 대한 애정을 수업 시간에 대놓고 표현한 선생님도 몇 분 계셨는데, 국어 선생님은 철학 책을 읽고 제출한 독후감을 칭찬하셨고, 세계사 선생님은 소설가를 꿈꾸면서도 국문과가 아니라 철학과를 지망한다는 사실을 높게 평가하셨다. 두 분 다 여자 선생님이고, 모교 출신이었다. 그렇게 선생님들의 눈에서 하트가 나오게 했던 내가, 딱 한 번 땡땡이를 친 일이 있다.

 

 우리 고등학교의 별명은 양로원이었고, 그만큼 교사들의 연령대가 높기로 유명했다. 역사가 오래된 사립학교이니 당연한 결과지만, 어린 나이에는 양로원에 배정된 게 왜 그렇게 싫던지…. 우리 중학교에서 같이 진학한 친구들이 손에 꼽을 만큼 적어서 더 싫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입학한 학교에서는 나같이 삐딱한 신입생이 많음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나 보다. 훌륭한 졸업생들을 초대해서 무용실에서 특강이 있다고 했다. 신입생들의 애교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보였다.

일주일 동안 진행된 특강에서 다른 선배들은 내 관심 밖이었지만, 소설가 박완서는 달랐다. 그녀가 동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가까이에서 본다고 하니 실감이 안 났다. 결혼 후 육아를 하는 와중에 무려 마흔의 나이에 데뷔해서 화제를 일으켰던 작가. 수많은 경단녀’ (출산과 육아 등으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을 일컫는 말)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그녀가 온다니!

백세 시대인 지금은 마흔 등단이 뉴스거리도 안 된다. UN에서 발표한 새로운 연령 분류에 따르면 18세부터 65까지는 청년이다. 하지만 70년대에 여자 나이 마흔이면 그냥 중늙은이로 여겨졌다. 아무런 목표나 꿈이 없는 나이로 취급당했다. 그런 편견을 깨고 등단한 데다가 계속 활발하게 작품을 썼으니, 열일곱 소녀의 눈에 그녀는 슈퍼스타였다.

 

솔직히 강연 내용에 집중하기도 힘들 만큼 설렜다. 강연이 끝나자마자 친한 친구에게 속삭였다.

우리 종례 땡땡이치고 교장실 앞에서 기다리자.”

교장실? ?”

박완서 선배님이 교장하고 같이 나갔어. 그 앞에서 기다리면 인사할 수 있을 거야.”

당시 담임은 내가 좋아하던 남자 국어 교사였다. 학교 신문반 기자 선발 때도 면접관이었고, 내가 기자로 뽑힌 것을 축하하고 격려해 주신 분이다. 그분 눈 밖에 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짓을 꾸미고 있었다.

 친구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종례를 우리 둘 다 빠지면, 담임이 금방 알아차릴 텐데?”

 상관없어. 딱 한 번이야, 이번 한 번만.”

 교장실 앞에서 혼자 기다려도 될 것을, 왜 굳이 친구를 끌어들였는지…. 지금 생각하면 내 용기가 그만큼 부족했나 보다.

 친구는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간절함이 통했다. 다들 교실로 돌아가는 와중에, 우리는 1층 교장실 앞으로 갔다. 기다리는 내내 너무 초조하고 떨렸다. 그사이 종례가 끝나면 어쩌지, 나와 친구의 땡땡이를 담임이 알아차리면 어쩌지,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교장실 문이 열리고 박완서 선배의 얼굴이 나타났다. 90도로 꾸벅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는 올해 입학한 곽지원입니다!”

 , 그래요? 반가워요.”

 오늘 선배님 특강 잘 들었어요. 저도 선배님처럼 훌륭한 소설가가 되는 게 꿈입니다!”

그녀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열심히 쓰세요. 그럼 언젠가는 좋은 작가가 될 거예요.”

 

막내 자식 또래의 당돌한 후배에게, 그녀는 무척 따뜻하고 너그러웠다. 그 따사로움이 나를 보호막처럼 감싸면서, 땡땡이에 대한 불안과 초조도 멀리 달아났다. 그 무엇도 두렵지가 않았다. 그런 기()와 축복을 받았는데도, 아직까지 작가가 되지 못했다. 마흔을 훌쩍 넘기고 내일모레가 환갑인데, 나의 미망 (迷妄)이 땡땡이는 안 되게 하고 싶다. 담임이 종례 땡땡이를 눈감아 준 것처럼, 선배님도 지금 저 위에서 나의 땡땡이를 지켜보고 계시려나?

 

 *미망 (迷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상태)

*미망 (未忘: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음 / 박완서 대하소설,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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