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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손    
글쓴이 : 김정호    24-08-08 12:06    조회 : 3,751
   엄마의 손.hwp (33.0K) [0] DATE : 2024-08-08 12:06:56

엄마의 손

 

김 정 호

 

 

아니 아니, 좀 더 아래. , 거기 거기어린 아이가 무에 그리 등이 가려웠을까, 어려서부터 꽤 커서까지 나는 엄마에게 자주 등을 들이대며 긁어 달라고 졸랐다. 정말 등이 가려웠을 때도 있었지만 방바닥을 이리 저리 뒹굴며 심심하고 무료했을 때나 졸음이 올 때, 그리고 괜스레 응석을 부리고 싶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사실 엄마의 손은 마디가 가늘고 뽀얀 예쁜 손이 아니라 손마디가 굵고 손바닥은 마른 나뭇잎처럼 건조하고 거석거석 했다. 등 긁어 달라기에는 최적화된 손이었다. 엄마는 내가 아프지 않게 때론 긁어주고 때론 슬슬 문지르기도 하여 강약을 잘 조절해 주셨다. 나는 엄마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기가 일쑤였다.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성품이 엽렵하고 손끝이 야무졌던 엄마는 하루 종일 쉴 틈이 없었다. 내 고향집에 대한 유년의 기억에는 구석구석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던 듯하다.

이른 아침 물 뿌려 싸리 빗질한 마당은 막 세수를 마치고 단장한 듯 말끔했다. 앞마당 가운데 널찍한 수도 간에 나가 앉아, 시원하게 대야에 물을 받아 푸푸 세수를 하며 올려다본 하늘은 얼마나 푸르렀던가. 이때쯤이면 달그락거리는 친근한 소음과 뜸 들여지는 구수한 밥 냄새가 부엌 쪽에서 흘러나와 밤새 비워있던 우리의 허기진 배와 코끝에 행복한 자극을 주었다. 어린 시절의 하루는 늘 부지런하고 살뜰한 엄마의 손끝에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앞마당 화단에는 엄마의 손길에 잘 길들여진 꽃나무들이 서로 다투기라도 하듯, 이른 봄부터 얼굴을 드밀기 시작하여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분꽃, 수국, 접시꽃 등 온갖 꽃들이 여름을 지나 늦은 가을까지 앞마당에 어우러졌다. 여름날이면 수돗가 포도나무 넝쿨에 열린 알알이 까만 포도들을 오빠들과 나는 겅중겅중 뛰어올라 따 먹었다. 포도 씨로는 후두둑 멀리 뱉기 시합을 했다. 무더운 날 저녁이면, 포도나무 아래 놓인 들마루에 두런두런 둘러앉은 저녁 밥상은 별난 반찬이 아니었어도 얼마나 달고 맛났던가.

옥양목 이불 홑청을 뽀얗게 삶아 풀 먹여 방망이로 다듬이질할 때는 나도 엄마와 마주앉아 장단 맞춰 방망이질을 거들었다. 또닥또닥, 또르르 딱딱...잘 손질된 이불 홑청은 앞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서 깃발처럼 하얗게 펄럭였다. 새 이불을 처음 덮을 때, 피부에 와 닿을 기분 좋은 차가움과 사각거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즐거웠다. 잘 마른 이불 홑청을 굵은 바늘로 시치는 엄마의 손은 거침없고 민첩했다.

가을이 오면 일 년 내 쓰다 찢기고 구멍 난 방문 창호지를 새로 바르는 일로 엄마는 겨울채비를 시작했다. 깨끗한 국화 꽃송이와 잎을 골라 창호지 문짝의 손잡이 가까운 곳에 꽃잎과 잎 두세 개를 예쁘게 바른 후, 그 위에 창호지를 덧발라준다. 팽팽하게 잘 발라진 하얀 창호지 문살에, 햇살 사이로 비춰오는 국화꽃들은 문풍지를 몹시 흔들던 깊은 겨울날에도 계절을 잊게 했다. 방문 고리를 잡아당길 때 마다 그 멋스러움은 한층 살아났다.

겨울이 오면 온돌방 아랫목이 식지 않게 늦은 밤이나 새벽에도 일어나서 이 방 저 방 연탄불을 갈곤 하셨다. 불기운이 남아 벌겋게 들러붙은 연탄들을 떼어 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바람이 윙윙 우는 깊고 긴 겨울밤에도 우리는 따끈따끈한 아랫목에서 서로의 살을 부비며 잠이 들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나는 조금 자란 후에나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나의 숱한 추억들은 엄마의 따뜻한 손끝에서 나온 사랑이었음을.

 

노인이 된 후, 엄마는 고향집을 떠나 서로 고만고만한 거리에서 살고 있는 우리 형제들과 가까운 아파트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엄마는 자식들을 다시 가까이 두고 자주 보게 되는 것에 아주 흡족해 했다.

그러던 언젠가부터 엄마는 아주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부쩍 기억력이 없어졌다고 걱정될 즈음의 어느 날, 엄마는 주방에서 서성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망연자실 서 있는 엄마의 모습에 뭔가 낭패한 느낌이 들어 얼른 엄마에게로 다가갔다. 엄마는 거의 울먹이는 표정으로 난 이제 아무 것도 못하겠어. 어떻게 하는지 아무 것도 생각이 안나...’ 엄마는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해 왔던 밥과 반찬 만드는 부엌일이 하얗게 떠오르질 않았던 것이다. 겁먹어 거의 주저앉을 것 같은 엄마를 얼른 일으켜 껴안고 괜찮아, 괜찮아...괜찮아 엄마...내가 다 할게

나는 그렇게 엄마를 껴안고 등을 어루만지고 토닥이며 한참을 서 있었다. 묵직한 아픔의 덩어리가 가슴 위로 올라오고 그 둔탁한 통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나는 엄마를 안고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엄마도 울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엄마의 치매는 서서히 안 좋아져서, 급기야는 누군가를 의지하여 잠깐씩 산책을 나가는 일 외에는 거의 모든 일상을 내려놓고 조용히 집 안에만 있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착한 치매, 예쁜 치매라고 하던가, 조용하고 곱게 그러나 많은 것들이 엄마의 기억 속에서 하얗게 사라져 버렸고 우리 형제들이라도 알아보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 나는 중요한 일이 아니면 거의 매일 엄마를 만나러 갔다. 항상 소녀 같은 함박웃음으로 날 반겨주던 엄마에게 내가 먼저 하는 인사는 볼 부비기, 껴안기, 등 쓸어주며 토닥여 주기 등이었다. 햇빛 좋은 낮 시간에는, 엄마의 손을 잡고 나란히 소파에 앉아 하염없이 창가를 내다본다. 마치 멈춰진 시간과 공간에 둘이 앉아있는 듯했다. 그때서야 느끼게 된 엄마의 손은 거칠지도 메마르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손바닥은 아기살처럼 보드랍고 따뜻했다. 엄마의 손은 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제서야 쉴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엄마와 딸로 만난 이 세상에서의 숱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우리 둘만의 이야기들을 좀 더 일찍이 많이 나누었어야 했음을. 이제는 함께 나누지 못하게 되었음을. 기억의 퍼즐 조각들을 엄마와 하나씩 맞춰가고 싶은데, 내 기억의 퍼즐들은 빈틈없이 빼곡한데, 엄마의 퍼즐들은 흐트러져 어디론가 부유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뿌옇게 사라져 휘발되어 버린 걸까.

끝내 엄마와 나는 퍼즐의 한 조각도 온전히 맞춰보지 못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오감(五感)으로 사람이나 사물을 오래 기억하거나 반추한다. 시각으로 오래 남아있는 모습이나 장면들, 청각으로 울림을 주는 목소리나 말들, 후각으로 살아있는 냄새나 향기, 미각으로 느껴지는 맛과 식감, 촉각들로 기억되는 느낌이나 온도 등.

나는 촉각으로 오래 엄마를 기억하고 있다.

 

엄마가 몹시 그리운 날은 눈을 감고 가만히 그리고 미세하게 손가락 끝을 움직여 본다. 어김없이 내 손은 기억한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따뜻함과 아쉬움과 아픔으로, 끝내 놓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손을...

거기, 가만히 엄마의 손이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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