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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볕 아래 장 담그던 날    
글쓴이 : 황선금    25-03-24 12:53    조회 : 2,028
   황선금-봄볕 아래 장 담그던 날.hwp (85.5K) [0] DATE : 2025-03-24 12:53:57

봄볕 아래 장 담그던 날

황선금 

장담그기 좋은 달은 음력 정월이라고 한다. 올해는 장을 담가야 할 것 같은데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아 망설이다 어느덧 정월달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새삼 어머니 살아계실 때 장 담그는 법을 열심히 배워두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남는다. 

어머니는 2019년 가을 87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다. 그해 설날, 어머니는 명절을 쇠러 간 나에게 정월에 장을 담가야 하는데 언제 시간이 되느냐고 물었다. 그 해부터는 철원에 있는 동생 집에서 장을 담가야겠다며 하시는 말씀이었다. 정월이 다 가기 전에 장 담그러 시골 가자는 어머니 말씀이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처럼 하시는 말씀이니 시간을 내겠다고 했다. 

그동안은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서울 아파트 베란다에서 장을 담갔다. 그 이전에는 메주를 언제 쑤는지. 언제 장을 담그는지 알지 못했다. 가끔 집에 가면 어머니가 햇간장, 햇된장이라며 싸주면 덜렁덜렁 들고 와서 먹었을 뿐이었다. 엄마 손맛에 길이 들어서일까, 시장에서 파는 장맛은 들척지근하여 입맛에 맞지 않았다. 나물을 무치거나 조림 반찬을 할 때 간장, 된장으로 간을 하면 다른 조미료가 필요하지 않았다. 본래 재료의 맛을 살리면서도 구수한 단맛이 난다. 어쩌다가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한 사람들은 내 손맛이라고 추어주었지만, 어머니의 장맛이야말로 비결이었다. 

2018년 동짓달, 어머니는 메주를 쑤어야 한다고 나를 불렀다. 그즈음에는 책임자로 몸담고 있던 공동체에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아서 동분서주할 때였다. 예전에는 소리 소문 없이 메주를 쑤던 분이 왜 부르는지 의아해하며 집으로 갔었다. 집안에 들어서니 이미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진 커다란 양은솥단지에서는 콩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어머니는 노란 콩 빛깔이 불그스름해지기까지 삶아야 한다면서 중간 불로 서너 시간 더 끊여야 한다고 했다. 다 삶아진 콩을 커다란 대야에 쏟아붓고 으깨는데 쉽지 않았다. 뜨거울 때 주물러야 곱게 이겨진다고 하여 무릎을 꿇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빨래하듯 문질렀다. 뽀얗게 피어오르는 더운 김이 서린 얼굴에 땀이 줄줄 흘렀다. 

설을 쇠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정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이윽고 장담그기 좋은 마지막 날이라는 삼월삼짇날, 어머니를 모시고 철원으로 갔다. 뒤뜰 장독대에 놓인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봄볕을 받아 반짝거렸다. 장독대 옆에 어머니가 구부정히 앉으셨는데 예전보다 더욱 야위어 보였다. 깊게 패인 주름마다 고단함이 스며 있었고, 허리는 점점 더 굽어 곧게 펴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제야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채근한 이유를 깨달았다. 너무 늦게야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었다.

어머니께 일일이 물어가며 처음으로 장을 담갔다. 항아리 속은 볏짚을 태워 소독하고, 메주에 핀 곰팡이는 물에 씻어서 돌담 위에 널었다. 메주 한 말에 소금물30를 넣는다. 간을 맞추기 위해 소금을 국대접으로 여덟 번 넣었다. 달걀을 띄우자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큼 물 위에 동동 떴고, 어머니는 간이 됐다고 했다.

항아리에 메주를 넣고 소금물을 가득 붓고, 마른 고추 일곱 개, 대추 일곱 알, 숯 세 개를 띄었다. 찰랑찰랑한 장항아리 속에는 파란 하늘과 흰 구름, 반짝이는 봄볕까지 스며들었다.

엄마, 장에 고추, 대추, 참숯은 왜 넣는 거지요?”

고추는 방부제 역할을 해주고, 숯은 잡내를 잡아주고, 대추는 단맛을 내준다고 하더라. 또한, 부정을 막아준다고 예부터 그러더라.”

되돌아보면 어머니는 이미 우리 곁을 떠나실 준비를 하시면서 삶을 하나씩 내려놓으셨던 것 같다. 어머니께 무심했다는 자책이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엄마의 흰 머리카락이 명지바람에 가늘게 날리던 그 봄날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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