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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석씨    
글쓴이 : 표경희    18-07-01 13:17    조회 : 3,304
   만석씨.hwp (16.5K) [1] DATE : 2018-07-01 13:17:36

만석 씨

표 경 희

난 생 처음 하룻저녁에 장례식장을 두 군데 다니는 경험을 했다. 첫 번째는 혼자서 다녀왔고, 두 번째 조금 먼 거리는 남편 옆 조수석에 앉아서 다녀왔는데 집에 도착하니 다리가 풀리는 게 주저앉을 것 같다. 죽은 이들과 작별 의식에 이렇게 정신적인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한 곳은 직원 어머님 빈소였다. 7남매의 막내인 직원 어머님은 89세로 요양원에 3년을 계시다가 주무시는 잠에 가셨다 한다. 그래도 편히 가셔서 다행이네 하면서 위로의 말을 건네니 “그래도 제가 다 부족한 탓 이죠” 한다. 호상이라서 마음 가볍게 담소를 하고 일어섰다.

다른 한 곳은 20년 전쯤에 방송통신대학교 출석 수업이 있던 둘째 날인가 셋째 날에 “저 우리 스터디 그룹하려고 수업 끝나고 망우공원 잔디밭에서 몇 명 모이기로 했는데 같이 가시죠?” 이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만난 만석 씨가 있는 곳이었다. 장례식장 입구에 향년 52세라는 글자가 도드라져 보이면서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나 보다. 조문을 하려고 들어서니 조문 중인 사람들과 뒤에 한 줄이 더 서 있다.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상주 줄의 만석 씨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부인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손수건으로 훔쳐냈다. 바라보던 나도 눈물이 맺히면서 울컥하는 것이 문상도 전에 벌써 감정 추스르기가 너무 힘들었다. 큰 절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 ‘착한 사람, 좋은 사람 잘 가시오’ 라는 말만 되뇌었다. 상주 줄에 서 있는 큰아들, 작은아들 그리고 만석 씨 부인과 절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그녀를 감싸 안았다. 내 품에서 “제가 만석 씨를 너무 일찍 보냈어요” 하며 오열을 토하는데 내 가슴도 무너졌다. 하느님이 착한 사람이라 자신 곁에 두려고 너무 일찍 데려 가셨네 하며 같이 울었다. 옆에서 남편이 다른 사람도 문상을 해야 한다고 봉투 넣고 나가자며 잡아당겼다. 옆에 서있던 맏이가 “엄마도 문상객들께 인사도 하고 좀 앉아 있다가 오세요” 하며 내 손을 잡고 있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의젓했다. 미리 와서 앉아 있던 우리 스터디멤버들 모두가 빨간 토끼 눈이었다. 그렁그렁한 눈물을 삼키면서 자리에 앉았다.

아마 10년 쯤 지난 오래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병상에 앉아서 웃던 모습이 생생했다. 만석 씨가 입원해서 뇌수술을 했다는 소식에 병원을 찾았더니, 병상에 크림색 수술 모자를 쓰고 씩씩하게 앉아있었다. “누님, 저 괜찮아요. 머릿속에 종양이 신경을 누르고 있어서 제거했어요. 머리는 갈라서 수술하고 스테이플러로 봉합했는데 조금만 있으면 붙을 거예요.” 해서 어쩌다 그랬는데 하니까 며칠 전에 버스에서 내렸는데 도대체 집이 어딘지 생각이 안 났단다. 그래서 핸드폰에서 친구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로 집을 못 찾아 가겠다고 했더니, 친구가 달려왔고 그 길로 병원에 왔단다. 뇌 사진 촬영하고 진찰한 의사가 빨리 수술 날짜 잡자고 해서 수술했다면서 별일 아니라는 듯 환하게 웃었다. 이젠 괜찮은 거야 하니까 지금은 수술로 뇌가 좀 부어서 그런지 통증은 있는데 기억은 괜찮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병원을 나서는 나를 배웅하겠다는 것을 말리니까 “누님, 머리 수술했지 다리는 멀쩡해요” 해서 같이 웃었다. 그 후에 가끔 만나거나 통화할 기회가 있을 때 “머리는 괜찮지. 어떻게 지내?” 하고 물으면, 그 동안 좀 쉬다가 지금은 대구 근교에서 좀 떨어진 한적한 시골 요양병원에서 일해요 할 때도 있고, 지금은 대구 ㅇㅇ정형외과에 있는데 일도 힘들지 않고 원장님도 괜찮고 지내기 좋아요 할 때도 있었다. 만석 씨는 물리치료사였는데 건강때문인지 이직도 잦았고, 전문직이라 일자리도 쉽게 구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또 10년이 무심하게 흘렀고, 얼마동안 소식이 뜸하던 사이에 이렇게 마지막으로 우리를 불렀다.

서울에서 남편을 따라 대구로 내려와 지낸지 5년 남짓 되었을 때였다. 집과 직장만 오가는 시계추 같은 삶에서 탈출이 방송통신대 전자계산학과 편입이었다. 정보통신 기술 보급이 한창이던 때에 얼리어댑터가 되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다른 분야 사람들과 만남이 좋았다. 직장과 집만 맴돌던 내게 여러 직종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일은 신세계였다. 내가 모르는 세상의 간접체험이었고, 한참 어린 젊은이들과의 만남이라 많이 신선했고, 그들의 젊은 문화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것이 즐거웠다. 그 때 멤버 9명 중에 가정이 있는 사람은 나와 만석 씨 둘이었는데, 나 다음의 연장자인 만석 씨와 나이차가 8살이었다. 그런 젊은이들과 지낸 그 시간들이 내가 호사를 누릴 수 있던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는지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지금은 그때 연장자로서 그들을 좀 더 배려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가 있다. 방통대 저녁 출석 수업이나 스터디가 끝나면 지나가는 길목이라며 집까지 항상 데려다주고 가던 만석 씨였다. 대구는 10시만 넘으면 버스가 끊어져서 택시를 타야했는데, 내가 살던 곳은 대구의 베드타운이라 저녁 늦은 시간에는 시내로 나오는 사람이 드물었다. 먼 거리를 빈차로 돌아 나와야 하므로 택시기사들의 승차 거부나 푸대접은 당연한 일이었다. 집으로 가는 일이 큰 걱정거리였던 나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 준 고마운 수호 천사였다.

또 잊을 수 없는 일은 시골에 계시는 시어머님이 동네에 누구는 아들이 간호사를 집으로 보내주어서 집에서 편히 누워서 링거 영양제를 맞은 것을 자랑한다고 부러워하셔서, 그 영양제나 포도 주스 한 병이나 효과는 똑 같다고 하다가 어머님께 야단을 맞았다는 얘기를 모임에서 무심코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만석 씨가 직장으로 전화를 했다. 그 때 만석 씨는 대구근교 시댁에서 좀 떨어진 정형외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누님, 시골에 어머님 집에 계시면 제가 오늘 점심시간에 간호사 데리고 가서 영양제 한 병 놓아 드릴께요” 했다. 그 마음도 너무 고마웠지만 어머님이 우리 며느리 덕택에 자신도 집에서 링거 영양제를 맞을 수 있다고 좋아하실 생각에 더 취해있었다. 그 뒤에 고맙다고 인사는 했겠지만 밥이라도 한 번 사주었는지 기억이 없다.

지난 6개월간 만석 씨는 서울 병원에서 수술을 두 번 했다고 한다. 첫 번째 수술에서 한 쪽 종양은 제거했는데, 두 번째 수술에서는 종양이 너무 많이 퍼져 손을 쓸 수가 없었단다. 그 후에 마지막 쉼터가 된 이곳 요양원에서 1주일을 지내고, 지금 우리와 영원한 이별의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 어린이집 원장으로 일하는 부인은 3일 전에 맹장 수술했고, 하필 어린이집의 감사 기간과 겹쳐서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정작 남편과 함께 해야 하는 중요한 시간들을 놓쳐버린 것이 얼마나 아쉽고 미련이 남을까 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또 붉어졌다. 매사에 낙천적이고 배려심 많은 만석 씨가 어떻게 했을지는 안 봐도 그려지는 상황이라 더 마음이 아팠다. 마지막 순간까지 혼자서 힘들게 사투를 벌였을 만석 씨에게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주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했다.

대구에 내려와서 근무하면서 더운 날씨와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분위기에 억눌려 숨쉬기조차 힘들다고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일과 후에 만나서 어렵고 힘든 전자계산학 과목들을 이해하느라 머리를 쥐어짜면서 웃고 함께 지내던 소중한 인연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만석 씨가 일깨워주고 가는 마지막 선물인데 나는 또 받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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