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프로포즈를 하면서 간드러지게 불러주던 나훈아의 제목 모르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실룩거리는 힙과 함께 애호박을 써는 도마 장단에 따라 칼날이 연신 춤을 춘다
오늘, 출근 때부터 더딘 시간이 이제 오후 4시를 가리킨다.
조사계 막내 김순경이 으레 건넨 물 텀벙 밍밍한 믹스커피가 입 안 가득 헤즐럿향으로 감돌면서 목넘김 마저 부드럽게 느껴지는 건 퇴근 후 남편을 만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계장의 아침조회 잔소리를 콧등으로 듣고 화장실 가는 척 후다닥 경찰서 뒷마당을 가로질러 직원들과 되도록 멀리 떨어진 등나무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뚜뚜뚜~~~’계속된 신호음에도 남편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직 회의 중인가?’
몇 번의 시도에도 전화기 속 상냥한 아가씨의 녹음된 음성은 “지금 고객의 사정으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대답만 되풀이된다.
길게 늘어져 머리카락을 살살 건드리는 등나무 잎을 무심히 똑, 똑 떼어낸다
애꿎은 잎들이 발밑에 수북이 쌓여갈 즈음 손을 타고 전해지는 강한 진동.
옅은 미소를 지으며 콧소리로 답한 전화는 월요일에 출석하기로 한 고소인이 약속도 없이 경찰서에 오고 있으니 조사를 준비하라는 같은 팀 최경사의 퉁명스런 전화였다
구겨진 종이컵 속에 조금 남은 커피를 맛있게 빨아 먹는 파리가 얄미워 휴지통을 발로 툭 쳤다. “엥~~엥” 원망하듯 원을 그리며 날다 이내 제자리로 돌아온다.
‘전화가 온줄 몰랐나? 딱 한번만 더 해봐야지…….’ “내 사랑”이라고 적힌 단축번호 1번을 꾹 누른다
뚜~뚜~ 얼마의 신호에 “어! 자기야! 전화 많이 했었네” 남편 목소리가 들렸다.
맘 같아선 철근도 녹일 듯 진한 콧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순간 나는 심통난 목소리로 변해있었다.
“잘못 눌렀나봐요, 그래서 신경 쓰지 말라고 전화한거에요. 참! 오늘이 토요일이네요, 전혀 몰랐네. 몇 시에 와요?”
카멜레온 망토를 뒤집어썼는지 금세 애교 섞인 목소리로 변했다
“사무실 정리하고 나가면 3시 기차는 타겠는걸 집에 도착하면 5시쯤 되겠네”
“저녁 반찬은 뭘 준비할까요?”
“우리 자기가 끓인 된장찌개가 최고지. 매일 조미료 가득한 음식만 먹었더니 울 자기가 만든 밥이 그립네.”
“홍홍홍~ 뭘, 된장찌개 하나가지고 …….”
동그란 눈이 반달눈이 될 때까지 까르르 웃음을 끊지 않게 이어갔다.
“알았어 바람같이 쌩하고 가서 꼭 안아줄게 사랑해 ~”
“홍홍홍 저도요. 조심해서 와요.”하며 잘 구운 횡성한우의 짙은 육즙을 입 안 가득 베어 문 황홀감으로 전화를 끊는데 “아이쿠! 경찰서에서 참기름 냄새가 솔~솔 나 길래 어딘가 했더니 이 형사네 신혼집 참기름 짜는 냄새였구나! 킁킁킁”
언제 왔는지 강력반 김경사가 농을 던진다.
“아..네 네” 빨개지는 볼이 들킬까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부랴부랴 사무실로 와보니 검은 피부의 굳은 인상을 한 사내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그xx가 돈을 빌려가서 안준단 말이야! 그놈이 xxx야. 얼른 잡아들이지 않고 뭐하는 거야!”
사건을 재촉하며 첫마디부터 욕설이다. 전 같으면 나도 같이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거렸겠지만 남편 만날 생각에 조사 내내 가시 돋친 말들도 귓불을 간질이는 강아지풀 같았다.
툴툴대던 고소인도 짜증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제 풀에 지쳐 “에잇 사람 사는게 다 그렇지, 안볼 사람도 아니고 고소 취소할게요. 형사양반 수고했수. 경찰서에 와서 속에 있던 맘 다 풀고 나니 후련하네.”하며 고소취소를 밝힌다
오후 1시, 분주한 퇴근길 마음은 벌써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다
“파, 감자, 멸치, 된장은 집에 있고 돼지고기, 양파, 당근…….뭐가 빠졌지? 참 두부! 잊을 뻔 했네. 두부야 내가 간다.”
매주 토요일이면 초긍정적 생각이 어디에서 샘솟는지 모를 일이다
부랴부랴 쌀을 씻는데 징징~핸드폰이 울린다. 딱 봐도 남편이다.
“여보세요~” 출처를 알 수 없는 섹시함을 내세워 맹맹이 목소리로 답을 하자 “자기야, 나 터미널 도착했어 얼른 갈게 울 자기 보고 싶다.”
남편의 낮은 목소리에 주방의 열기 탓인지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서둘러 전화를 끊고 밑반찬을 꺼내려고 냉장고를 열자 며칠 전 먹다만 요구르트가 눈에 들어와 아무 의식 없이 목에 털어 넣었다. 무설탕제품 이었지만 그 평범하지 않은 달콤,찝지름,텁텁한 맛이 목젖을 타고 식도를 지나 온 몸으로 퍼진다
날쌘 걸음으로 두부를 사왔고 식탁엔 정갈하게 썬 김치, 아몬드를 곁들인 멸치볶음, 노릇노릇하게 구운 고등어를 예쁜 접시에 담아 한결 멋을 부렸다.
지글지글 찌개 끓는 소리에 맞춰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이게 뭐지? 옆구리가 결리며 꾸르륵! 꾸르륵! 아랫배가 요동을 친다.
이를 어쩐다! 황홀함까지 느끼게 했던 요구르트의 오래된 유산균들의 습격에 뱃속이 난리가 난 모양이다.
‘남편이 곧 도착할 텐데…….’
후다닥! 화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날쌔다.
쏴~아~ 시원하게 볼일을 보니 뱃속이 가벼워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훗훗 거의 다 왔겠네. 난 새댁이니까 뒤처리는 깔끔해야지.’
두루마리 화장지를 여러 번 말아 다른 날보다 유독 깔끔을 떨었다
오른손을 뒤로 뻗어 변기 물 내리는 레버를 손으로 꾹 눌렀다. 평소 우렁찬 회오리를 일으키며 빨려가던 그 통쾌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난 순간적으로 내 귀를 의심하며 변기 물탱크에 물이 차길 기다렸다가 다시 한 번 레버에 손을 올렸다. 손끝에 닿는 묵직함은 없고 털커덕 하며 레버는 더 이상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놀란 마음에 엉덩이를 살짝 들어 보니 휴지뭉치와 오물들이 강강술래 원을 치고 빙빙 돌기만 한다.
‘이를 어쩌지, 변기가 막혔네!’
고무 뚜러뻥으로 손목이 시리도록 온 힘을 써봐도 물이 빠질 생각이 없다.
남편이 정류장에 내려 걸어오는 발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순간 뒤통수가 멍멍해지며 친정엄마가 보고 싶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콩닥콩닥 뛸 만큼 반가운 사람인데 지금은 남편 없는 곳으로 도망을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순간 모면을 위한 번뜩임으로 화장실 변기뚜껑을 덮었다 신발장에 있던 투명테잎을 찾아 변기뚜껑을 열지 못하도록 힘주어 꽁꽁 감았다. 그리고는 빨간색 매직으로 변기뚜껑에 ‘?’를 쳤다.
잠시 후 띵똥~ 초인종이 울렸다. 버선발로 뛰어가 반기던 남편 이었는데 축쳐진 어깨를 앞세워 뚜벅뚜벅 걸어갔다. 환한 얼굴의 남편을 보자 눈물이 났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너무 창피했고 싫었다.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가로 저었다.
“왜 울어? 내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
영문도 모르는 남편은 어리둥절해하며 현관문 앞에서 우는 나를 달래주어 겨우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얼른 손 씻고 우리 밥 먹자.”는 말과 함께 화장실로 향하려는 남편!
“안돼요!” 나는 순간적으로 범인을 검거하던 순발력을 발휘해 온 몸을 날려 화장실 문고리를 잡았다.
“여기는 안돼요!. 여기 들어가면 안돼요.” 그 소리는 혼자 범인을 제압한 후 동료를 부르는 다급한 외침보다 더 컸다.
“들어가면 안돼요. 절대 안돼요!”
“왜 화장실에 뭐가 있어?”하며 다가오는 남편의 팔힘에 밀려 문고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광화문 대로변에 알몸으로 선 듯한 서늘함이 나를 휘감았다.
화장실 안에 펼쳐진 희한한 광경에 잠시 머뭇거리던 남편은 실소를 터트렸다
더 이상 숨을 곳도 도망칠 곳도 없었다.
“무...울이 안 내려가요. 그러니까 문 열지 말라고 했잖아요.”하며 얼굴을 감싼 채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남편은 조용히 화장실 문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급상황을 해결할 방법들을 찬찬히 알려주었다.
나는 남편의 지시대로 칭칭 감긴 투명테잎을 떼어낸 후 물이 가득 담긴 큰 세숫대아를 높이 들어 물 내림 레버를 누름과 동시에 사정없이 변기 속에 들어부었다
“꾸르륵 꾸륵 꾹꾹……. 쏴~~~아”변기 속에 뒤엉킨 나의 잔류물과 풀린 휴지들이 커다란 회오리를 돌며 힘차게 내려갔다
“유레카! 유레카! 목욕하던 아르키메데스가 어려운 밀도측정방법을 알아내고 문을 박차며 거리로 뛰쳐나가 듯 난 화장실 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그 간의 부끄러움과 고마움이 교차하여 남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내 남편은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하며 어려운 문제를 내서 미안한, 시칠리아 히에론 왕이 아르키메데스를 치하하듯 내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우린 그렇게 한참을 화장실 앞에서 서로를 안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남편은 ‘관계자외 출입금지’ 푯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분만실에 들어와 직접 탯줄을 자르며 축복속에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갔다.
십 수 년이 지난 지금, 아이들은 하나 둘 늘어 셋이 되었다
남녀가 만나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영원히 감출 것 같던 비밀들이 하나 둘 벗겨지는 신혼초,
마치 결혼이라는 둘이 치는 화투판에서,
내가 실수로 놓친 똥광 낙장에 남편의 날벼락 같은 똥피 폭탄을 맞아 초라하게 피박이 되고 말았지만 세아이를 낳아 기르다보니 여자라는 웬만한 자존심은 그 날의 똥광폭탄에 다 날려버렸다
함께 가는 먼 인생. 자존심을 올인 당한 내게, 남편은 화투판 첫 뻑의 여유로움으로 언제나 두둑한 개평을 찔러준다
하지만 보이는 화투장이 전부가 아니 듯 베일에 가려진 나만의 뒷패를 지키고자 남편 앞에서 오늘도 괄약근을 힘껏 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