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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의고향    
글쓴이 : 김경선    19-04-22 22:39    조회 : 3,771

2의 고향

                                                                   김 경선

얼마 전 출장 가는 남편을 따라 북경에 다녀왔다.  나는 가족과 함께 2, 아이들의 유학과 직장문제로 15년 북경에 살았다. 두차례 살았던 곳에 2년만에 가보니 그 곳에서의 추억들이 생각 났다.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가 93년 가을쯤 이다. 92년 중국과 수교되기 2일 전 남편은 한국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중국 연변에 한국 백화점을 오픈했다. 중심상점이라는 백화점 한 층에 한국 상품을 전시, 판매하였다. 그 당시 중국과 수교하면서 남편 백화점이 한국에서 큰 뉴스였는지 남편 사진과 함께 한국일보 기사로 나오기도 하고 KBS 라디오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기대와 부푼 꿈을 안고 시작은 했으나 백화점 사장의 실수인지 고의인지  물건값을 회수할 수 없게 없었다. 남편은  서울에서 보다 중국에 직접 가서 관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가족은 중국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했다. 남편은 연변이 너무 발전이 안 돼 있기에 아이들과 내가 생활하기가 여러모로 불편할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생활은 북경에서 하기로 하고 이사하기 전에 한번 다니러 갔다. 그때 아이들 나이가 큰아이는 8살 작은 아이는 5살이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사회주의국가에 가서 산다는 것이 외국에 간다는 설렘보다 두렵고 무서운 생각이 앞섰다. 북경에 내려야 할 비행기가 기상악화로 천진공항에 착륙했다. 천진은 서울과 인천의 거리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도시이다. 우리를 마중 나온 조선족 지인이 순발력 있게 천진까지 와 주어서 늦은 밤 이긴 했지만 무사히 북경까지 갈 수 있었다. 다음날 시내 구경에 나선 우리들은 국방색 긴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법랑으로 된 컵을 들고 서서 식사를 하는 모습이 참으로 낯설었다. 한 백화점에 갔을 땐 우리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구걸을 하였다. 돈을 조금 주었더니 돌아가서 친구들을 열댓 명 데리고 다시 와 돈을 더 달라고 하더니 아들의 잠바를 벗기려고 하는 것이었다. 아들이 무서워서 우니까 딸도 덩달아 울었다. 아이들을 껴안고 도망가야 하는데 나 역시 무서움으로 발이 움직여 지질 않았다. 길거리엔 갓난아기를 안고 구걸하는 젊은 아낙들도 있었다. 가엽고 불쌍한 마음도 있었지만 또 옷을 벗기거나 여러 명이 달려들까 봐 돈을 줄 수가 없었다.  그런 일들이 있어서 두려웠지만 남편은 북경으로 가자는 결정을 내렸다.

 94 2, 짐을 먼저 배로 보내고 우리는 북경으로 갔다. 눈이 많이 내린 그곳은 춥고 을씨년스러워 마음까지 얼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북경에서 한인교회에 다니며 외로움을 달랬다.  한인교회 목사님은 청년사역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다. 우리 같은 어른들은 청년들을 위해 주일마다 1 1밥통과 비빔밥 재료 중 1가지씩을 준비해서 비빔밥을 점심으로 대접하는 봉사를 하였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풍요로운 주일이었다. 남편은 연변을 오가며  2년을 지냈지만 백화점 일은 해결이 되지 않았다. 더 이상 북경에 살 이유가 없어졌기에 귀국하였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남편은 한국에서 두 분의 형님들과 사업을 함께하며 마음을 달랬고, 사업도 조금씩 발전해갔다.

 큰아이가 중학교 3학년 1학기 때 남편은 아들이 북경 중의 전공하기를 권하며 유학 가기를 종용했다. 나는 아들을 혼자 유학 보내서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몇 달 동안 생각만해도 눈물이 나서 결국엔 작은 아이까지 데리고 내가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2002년 큰아이 고1, 작은아이 중1 올라가는 해 2월에 다시 북경으로 갔다. 94년의 북경과는 너무 차이가 나서 격세지감을 느꼈다. 발전 속도는 한 달 한 달이 달랐다. 24시간 일을 하기 때문에 서울에 다니러 왔다가 가보면 허허벌판이었던 곳에 건물이 올라가고 새로운 아파트들이 생기곤 하였다. 북경의 발전 속도를 보며 우리나라가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94년 그곳에 살 때는 생필품을 거의 한국에서 가져다 썼다. 물건을 살 수 있는 마트도 한곳에서 다 살 수가 없어서 생선은 30분 떨어진 어느 마트, 아이들 간식은 또 다른 마트 이렇게 물건 사러 다니는 것이 힘이 들었다. 2002년에는 대형마트와 백화점, 한국 상품 전문매장도 많이 생겨서 불편함이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회주의국가라는 생각이 전혀 안들 정도로 자유롭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자전거 행렬이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들고 고급 자가용들이 넘쳐 나는 도시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겉모습은 발전이 되어가도 사람들 의식수준은 따라가지 못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어서 답답하고 불편했던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남편의 뜻대로 아이들 둘 다 북경 중의대에 들어가서 1년 넘게 수업을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둘 다 중의대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방학이라 서울에 왔을 때 종합적인 적성 검사를 시켜 보았더니 내가 생각하고 있던 아이들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이 있었다. 완강히 고집하는 남편을 아이들과 셋이 합세하여 설득시켰다. 전공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입시 준비를 다시 시켰다. 아이들의 적성대로 큰아이는 무역학과, 작은 아이는 실내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작은아이는 직장에 다니느라 1년을 더 살았다.

그렇게 1년에 6, 7회 서울로 오가며 15년을 보냈다.

 2년만에 다시 방문한 북경은 변화가 거의 없는 지역도 있었지만 우리가 살던 지역은 큰 건물들이 세워지고 더 발전이 돼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자주 가던 식당에 가서 그동안 먹고 싶었던 중국음식도 먹었다. 오랜만에 만난 중국친구의 집에 가서 옛날 얘기도 하였다. 중국인들은 비취로 만든 고가의 악세서리를 참 좋아하는데 그 친구는 여러가지 악세서리를 가지고 나와 자랑하였다. 둘러앉아 중국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 보니 마치 고향 오랜 친구집에 놀러 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두차례 17년 동안 살면서 여러가지 추억을 쌓았으니 북경은 나의 제2의 고향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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