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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 봄바람에 동백꽃 지듯(합평작)    
글쓴이 : 한성환    20-03-23 06:43    조회 : 2,824
   저기, 동백꽃.hwp (16.5K) [1] DATE : 2020-03-23 11:35:34

저기, 봄바람에 동백꽃 지듯 / 한성환 

   남쪽 창이 희끄무레 밝아 오른다. 얼마나 되었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 아직 좀 이른 새벽인가 싶다. 머리가 무겁고 온몸은 풀을 먹여 놓은 듯 뻣뻣하다. 눈만 뜨면 박차고 일어나 아침마저 거른 채 출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퇴직한 지가 삼십 년이라니 세월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이러다가 아주 감아 버리겠지 싶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린다. 창밖 동백나무 꽃잎에 하얀 눈빛이 비친다. 간밤에 때늦은 눈발이라도 내렸나 싶다. 열린 방문 사이로 대리석 장식이 보인다. 숨은 그림처럼 알 수 없는 무늬들이 이채롭게 다가선다. 덜 깬 의식 탓인지 흐릿해지는 시력 탓인지 바깥 유리창에 성애가 뽀얗다. 아직 봄이라 말하기에는 바깥 날씨가 너무 춥다. 지난밤 잠자리가 편안해서 잘 잔 것 같은데도 뒷목이 뻑적지근하고 어깻죽지는 죽비로 맞은 듯 저리다. 마르고 축 늘어진 목울대 주름을 쓰다듬어 본다. 좀처럼 일어나기가 싫다. 조금 더 게으름을 피워 볼 요량으로 다시 이불속을 파고들려다가 깜짝 놀라 눈을 다시 치켜뜬다.

이상하다. 정신을 가다듬고 둘러보니 내 집이 아니다. 방안과 거실, 창밖의 분위기가 낯설다. 낯선 풍경에 가슴은 뛰고 머릿속이 혼란하다. 곰곰이 머리 굴려 봐도 알 수 없다. 여기가 어딘지, 무슨 일인지 생각나지 않는다. 침대, 이부자리, 조명등, TV, 스타일러, 화장대, 심지어 방금 본 창밖까지도 생전 처음 보는 것이다. 그런데 잠자리가 어쩐 일로 몸에 딱 맞는지 알 수가 없다. 방문 앞으로 낯선 그림자가 비친다. 목욕수건을 걸친 낯선 여인이 놀라 소리 지른다.

“앗! 누구야! 당신, 누구야!”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한마디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다그치듯 다시 물어온다.

“어째서 낯모르는 사람이 내 침대에 누워 있냔 말이요.”

답할 수가 없다. 아니, 할 말이 없다. 여기가 어딘지,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도무지 기억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기억이 안개 속을 헤맨다. 술깨나 즐겼지만 아니 청탁불구, 두주불사였지만 술 끊은 지 오래다. 그러니 과음 탓도 아닐 터, 요즘 가끔 깜빡깜빡 기억이 흐릿해지곤 하였지만 백지장처럼 하해지는 것은 처음이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일어나 앉아 물어본다.

“글쎄, 그게 말입니다. 생각나지 않아서 그러는데, 내가 여기 왜 있는 거지요?”

그녀는 이 어림없는 수작에 기막히다는 듯 대차게 따져 묻는다. 기세가 사뭇 등등하다.

“아니, 도대체 당신이 누군데 생면부지 내게 그걸 물어요? 내가 어찌 안단 말입니까?”

더더욱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도둑고양이 제 발 저리듯 웅크리고 있을 수도 남 일처럼 눈 내리깔고 딴청을 피울 수도 날 잡아 잡슈 하고 버틸 수도 없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방법을 모른다.

“그럼, 죄송한데 내가 누군지 혹시 아십니까?”

모기만한 목소리로 간신히 물어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데 들려오는 말이 이상하다.

“흥! 이 사람 좀 봐, 나도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데 당신을 어찌 알아!”

“어허! 이건 또 뭐지?”

오늘, 30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을 미리 가상해본 것이다. 아내가 만 스무 살 되던 해 겨울 시골장터 예식장서 식을 올렸다. 결혼 다음해 큰애를, 연년생으로 둘째를, 세 살 터울 막내를 두고 지금까지 고향에서 산다. 박봉이지만 아옹다옹 그렇게 살았다. 셋째가 대학에 진학할 무렵 아내가 옷가게를 시작했다. 억척스럽게 일하는 그녀로 생활은 전보다 나아졌지만 몸은 그만큼 망가졌다. 매일 밤 10시 넘어 퇴근하는 아내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가끔이나마 돼지고기 한 근 사다 김치 썰어 넣고 달달 볶아서 간단한 술상 보아주는 것뿐이다. 애쓴다고 고맙다고 제대로 감사의 말도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잘 먹고 달게 마셔주는 그 모습을 고맙게 생각했다. 그렇게 삼십칠 년, 어젯밤 얼큰한 그녀가 오히려 내게 함께해줘서 감사하다고 산만큼 그렇게 더 살다 함께 가자고한다. 오래 사는 것보다 마지막 날까지 치매 들지 말고 건강하게 살자 말해주었다. 낮에 ‘카카오 같이가치’에서 읽은 글이 생각나서다.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다. 「결혼한 지 52년... 우리는 오늘도 '처음' 만났습니다」의 주인공은 “제 남편은 오늘도 저에게 그런데 누구십니까? 로 하루 인사를 시작합니다”라 말하며 우리 사회 치매현실을 일러준다. 언젠가 아내와 내 앞에 현실로 다가 올 수 있을 그날의 아침을 상상하며 다짐한다.

(...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처음 본 듯 낯설어 할 그날이 오기 전까지 함께 살다 함께 가자꾸나. 저기 봄바람에 꽃잎으로 흩날리지 말고 몽우리 채 함께 지는 동백꽃처럼 말이다 ...)

아내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대신하여 그러하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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