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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된장    
글쓴이 : 김혜림    20-07-16 00:56    조회 : 5,599

된장

  김 혜 림 

 

 매년 음력 정월 보름이 조금 지나면 우리 집엔 장(醬)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시절을 핑계 삼아 고추장은 가끔 손쉽게 사 먹기도 한다. 그러나 된장은 결코 포기 할 수가 없다. 콩이 메주가 되어 간장을 뽑아내고 다시 된장이 되어가는 오묘한 생명의 과정, ‘발효’라는 시간이 가족의 건강과 끈끈하게 닿아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먹거리도 만남이 중요한 법이다. 노란 대두와 좋은 소금, 그리고 깨끗한 물과 잘 만들어진 장독이 만나야 한다. 담그는 손길의 정갈함과 섬세함은 덤이다. 운 좋게도 해 좋은 말날을 만난다면 더욱 금상첨화다.

엄마는 5일장을 누비고 시골 농가를 직접 찾아가 메주콩을 구하곤 하였다. 콩이 준비되면 마당엔 어김없이 장작불이 피어올랐다. 드디어 우리 모녀의 합작품인 마당 한 쪽의 화덕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어느 해 가을 날 벽돌을 쌓고 연통을 세우며 꼼꼼히 시멘트를 맨손으로 바르고 매달렸던 덕분이었다. 큰 솥을 걸고 불을 피워 노란 콩을 쑤기 시작하면 구수한 냄새에 입맛이 돌았다. 어느 정도 달궈지면 화기를 줄이고 넘치지도 타지도 않게 뚜껑을 살피며 감시해야한다. 그렇게 솥을 노려보며 신속히 저어주고 부지런히 들추며 맛있게 무르기를 기다렸다. 한 눈 팔지 않고 비리지 않게 속까지 잘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메주는 발효도 잘 되고 수개월을 지나면 맛있는 된장으로 환생하였다.

이미 간수가 잘 빠진 천일염을 구하고도 다시 오랫동안 소금을 말리던 엄마의 정성이 피곤해질 때도 있었다. 성인 한명이 들어가고도 넉넉할 독을 충북 단양까지 건너가 트럭에 실어오던 날, 도대체 왜 저러나 싶기도 했다. 그 큰독을 닦고 말리고 불로 소독하며 불순물과 싸우는 과정을 여러 번 거쳤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명산에서 흘러나온다는 1급수를 구하러 가는 대장정이었다. 깨끗한 물이 중요하다며 좁은 비포장도로를 한참이나 자전거로 달려가 물통을 수없이 실어다 날라야했다. 죽을 때까지 실크로드를 넘는다던 그 고단한 낙타가 된 기분이었다. 통을 엎지르기라도 하는 날이면 피곤함에 짜증이 섞이곤 했다. 그럴 때면 마음으로 되뇌었다. ‘된장 따위 절대 담가먹지 않겠노라’ 고.

나의 첫 된장은 스물여섯 이른 봄에 탄생했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대방동 옥탑 방에서 생애 첫 장 담그기를 꿈꾸었다. 서울의 생활비는 갓 상경한 사회초년생에겐 큰 부담이었다. 김치와 깍두기가 익숙해지자 겁도 없이 된장에 눈을 돌렸다. 구입한 메주가 도착하자 뜨악했다. 좁은 장독 입구를 계산하지 않은 이유로 돌처럼 딱딱한 메주를 식칼로 소분하느라 애를 먹었다. 씻어놓은 장독 안쪽에 불을 놓아 소독하고 달걀이 동전하나 크기로 떠오를 만큼 농도를 맞춰 소금물을 부었다. 메주 위로 누름돌을 덮고 숯과 홍고추도 동동 띄워 구색도 맞추었다.

옥탑 방 창가에서 터줏대감이 될 조그만 장독 위로 달이 차올랐다. 어마무시한 주인집 장독대가 부럽지 않은 사랑스러운 첫 장독이었다. 50일쯤 지난 후 간장을 뽑아 낸 메주는 으깨어지고 소금과 섞여 된장이 되었지만 다시 수개월 동안 익어가기를 기다려야했다. 좁은 장독 에 갇혀 발효하는 된장은 외로운 객지생활의 친구가 되었다. 누군가는 강아지를 키웠지만 나는 엄청난 미생물의 세계를 키워내고 있었다. 부자가 된 것만 같았다. 해가 좋은 날엔 뚜껑을 열고 얇은 망사만 입혀 세상에 내어놓고, 하늘이 흐리면 비 걱정에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분주했다. 그해 꿈처럼 다가왔던 첫사랑은 채 익을 사이도 없이 씁쓸하게 끝났지만 다행히 인생 첫 된장은 대성공이었다.

결빙의 시간이 지나고 따스한 봄볕 사이로 마당의 매화가 빛을 낼 즈음이면 항상 영화 <된장>이 떠오르곤 한다. 매화꽃잎이 삭아 든 항아리, 햇빛으로만 말려 세월로 간수를 쏙 뺀 소금, 아기흑돼지가 기른 콩, 산속 깊은 곳에 있는 옻 샘물, 매화주 누룩, 귀뚜라미의 공명, 햇살, 바람 그리고 눈물. 안타깝게도 이런 재료들이 현실의 나에겐 없다.

마당 그윽한 매화를 본다. 영화처럼 매화꽃잎이 땅에 떨어져 쌓이고 녹아들어 그 흙으로 독을 빚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금의 간수를 잘 빼고 질 좋은 대두와 깨끗한 물을 구하는 것은 가능하리라. 귀뚜라미, 햇살, 바람은 자연에게 살포시 기대어도 좋을 것이다. 스칠 인연들의 결에 따라 여러 색깔의 눈물도 흘리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깊고 향기로운 맛을 내는 나만의 된장을 만들어가고 싶다. 만드는 방법은 결국은 ‘기다림’이라는 것을 안다. 시간너머 인연을 꿈꾸며 급한 마음에 살며시 뚜껑을 밀어본다. 된장이 익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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