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봉이
김용무
기봉이는 내가 새벽 일찍 화물차를 타고 농장으로 갈 때나 저물어 집으로 돌아 올 때면 어김없이 고가도로 위에서 만나는 사람이다. 그는 머리에 띠를 질끈 메고 달린다. 하루에 두 번씩 달리는 것 같다. 한 쪽 팔을 묘하게 흔들면서 달린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달리는 모습을 보면 체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키에 개그맨 ‘박휘순’을 참 많이 닮았다.
초여름, 양파 캐는 시기가 되면 온 동네 일도 다닌다. 그는 일하는 것이 서툴기 때문에 남자지만 여자 품삯을 받는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일한다. 나는 그가 이 동네로 언제 이사(?)왔는지 잘 모른다. 우리 농장 건너편에 혼자 살고 있다.
“어이, 시간되면 우리 일 좀 해 주소”
했더니 좋아서 싱글벙글 웃으며 한걸음에 달려온다. 둘이서 같이 하는 일은 좀 느려도 잘 하지만, 혼자 하도록 두면 땀만 뻘뻘 흘릴 뿐 전혀 진척이 없다. 시킨 일은 끝까지 하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거짓말은 못 할 것 같다. 나이는 마흔이 넘었을 것 같은데 왜 혼자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그는 시골 교회 집사로 신앙심도 깊은 것 같다. 아무리 품삯을 많이 준다고 해도 주일 날은 전혀 일을 하지 않고 교회에 간다.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란다. 그래서인지 늘 걱정 없는 얼굴이다. 내가 늦은 시간 집으로 갈 때면 가끔 그 조그만 집에서 우렁차게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찬송 은사도 받은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기봉이는 개천 바닥에서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며칠 째 계속하고 있다. 장마가 끝나고 면사무소에서 보내준 중장비들로 여기저기 제방복구 작업을 했다. 다리도 새로 놓고 개천도 깨끗이 정비하고 제방도 튼튼하게 쌓았다. 이제 비가 많이 와도 큰 탈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깨끗해진 개천바닥에서 기봉이는 무얼 하는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내가 차를 세우고 내려다보니 크고 작은 돌을 신작로 위로 던지기도 하고 삽으로 바닥을 소리 나게 긁기도 한다.
“어이 자네 뭐하는가?”
위로 쳐다보고 싱긋 웃기만 한다.
“언능 올라와 보게 ”
땀을 닦으며 올라온다.
“또 비가 오면 어쩌나 해서요... .”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다.
내려다보니 잘 정리된 개천 바닥 도로변 쪽으로 작은 제방을 또 만드는 것이 아닌가? 순간 웃음이 나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필요 없는(?) 작업이지만 더욱 튼튼하게 해야 한단다.
“그거 하지 마시게”
했더니 그래도 해야 된다고 한다. 또 바닥에서 던진 작은 돌들로 신작로 개천 쪽에 경계를 만들고 흙을 덮는다. 10미터는 됨 직하다.
“아니 꽃밭이 아니오”
그냥 웃는 그는 화단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내년 봄에 꽃씨를 뿌린다면서 내가 알지도 못하는 꽃 이름을 말했다.
그 누구도 생각 못했던 개천의 작은 제방과 도로변에 화단 만들기... .
이 발상은 어디서 온 걸까?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그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걸까? 내년 봄이면 그는 자기의 소망대로 그 어떤 씨앗이든 마음껏 뿌리고 있을 것이다.
내년 3·1절 잠실 운동장 마라톤 대회에 참석한다고 한쪽 팔을 흔들며 열심히 달리는 기봉이를 보면 어떤 거대한 힘이 그를 이끌고 있는 것 같다. 그가 하는 일은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가을이다.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들어낸다. 먼 산의 색깔이 바뀌는 것을 보니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준비를 하는 자연 앞에서 숙연해 진다.
나는 아직도 그의 본명을 모른다. 기봉이는 나 혼자서 부르는 이름이다. 달리는 기봉이.
선한 사람이다.
내년에 그가 만든 꽃밭에서 일어날 아름다운 꿈들을 상상한다. 우리 동네 기봉이.
봄을 향한 땅속의 기운이 뜨겁게 밀고 올라오는 내년엔 3.1절 마라톤에 참가해 꼭 완주하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