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콩의 기억
정용주
기억이란 참 이상하다. 서너 살 때의 어느 봄날은 사진에 찍은 듯 머릿속에 남아 있어 신기하기 하고, 어떤 것은 가위로 필름을 싹둑 잘라낸 듯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트라우마나 놀라운 사건의 기억은 잊히기 어렵다. 내게도 그런 트라우마가 있다. 엄마에게 버려졌던 기억 같은 것 말이다. 나는 킹콩이라는 영화를 보러갔던 것과 엄마가 나를 버렸다는 사실을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또렷이 기억한다.
내가 보러간 킹콩이라는 영화는 검색해 찾아보니 1978년도에 개봉한 영화라고 한다. 내가 70년생이니 만 7살 정도의 나이였다. 난생 처음으로 극장이란 곳에 가서 영화란 것을 보았다. 어떻게 갔는지, 또 어떤 내용의 영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커다란 킹콩이 높은 빌딩에 매달려 울부짖는 모습은 영화에서 본 것인지, 아니면 영화관 앞에 간판에 그려진 그림이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손바닥에서는 꼬질꼬질한 땀이 샘솟고, 목이 아프도록 쳐들고 본 대형화면에는 어린 나를 정면으로 노려보는 희번득한 킹콩의 눈이 클로즈업 되어 있었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킹콩의 눈이 너무나도 무서워 내 눈도 덩달아 커지며 눈물이 고였다. 눈을 감고 무서운 장면을 애써 외면했지만, 머릿속에서는 같은 장면이 상상되어 눈을 한참을 감고 떠도 영화에는 아무런 공백이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내 기억에 각인된 것은 트라우마를 남길 만큼 인상 깊은 영화였거나, 내가 공포영화를 첫 영화로 접하기엔 마음어린 7살 소녀여서는 아니었다.
나에게 남은 강렬한 기억은 그 당시의 엄마다. 영화관에서 나와 고개를 돌려 올려다 본 엄마는 파머머리에 긴 롱코트를 입고 있었고, 정색을 하며 나를 떨치고 택시를 잡아타고 가버렸다.
나는 혼자 그 길을 걸었다. 머리위로 시멘트로 된 다리가 걸려있었는지, 시멘트 터널 밑을 걸어가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걷다가 앉다가 울다가……. 길에 있는 자갈을 발길로 차며 인도 끄트러미의 연석을 쭉 따라 걷다가 차도로 내려섰다가 보도블록의 금을 밟지 않고 박자 맞추어 걷다가 인도 턱에 걸터앉아 울기 시작했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고, 나온 눈물도 때국물로 말라붙은 후에야 엄마가 택시를 타고 나를 데리러 왔고, 아마도 택시에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얼마 전 한 살 터울인 언니에게 물었다. 예전에 킹콩 영화 보러 간 적이 있는데 기억이 나느냐고. 언니는 “네가 길 한복판에서 한걸음도 안 움직이고 집에 안가겠다고 떼쓰던 것은 기억나!” 라고 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난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데…….언니도 내가 왜 안가겠다고 떼를 썼는지까지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며칠이 지난 후 팔순이 넘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 어릴 때 엄마랑 킹콩 보러 간적 있지? 엄마가 날 버리고 간 게 생각나. 몇 시간 동안 굴다리 밑에서 울고 있는데 엄마가 다시 돌아와서 나를 데리고 갔어. 그때 나 버린 거 맞지? 왜 그랬어?” 엄마는 영화 재밌게 잘 보고 나와서 한 번 더 보겠다며 집에 안 간다고 떼를 써서 그랬다고 하셨다. 그랬구나. 그랬겠다. 고집이 센 어린 내가 문득 떠올랐다. 한번 울기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리고 한나절을 울어 기진맥진 했던 나다. 나에게 남았던 그 무서운 기억이 엄마와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해가 갈만한 해프닝처럼 느껴졌다.
참 이상한 일이다. 슬펐던 기억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멋대로 각색되어 나중에 떠올려 보면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도 하고, 정말로 별것도 아니었던 해프닝이 시간이 가면서 머릿속에서 트라우마로 자라나 어느 날 갑자기 괴물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킹콩의 기억은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나에겐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제야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갑자기 칭얼거리는 어린 내 얼굴이 더 크게 내 머릿속에 떠오른다. 어찌 보면 기억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난 어릴 적부터 무의식적으로 기억들을 지우려고 했나 보다. 내가 혼자서 키워온 상상이 반드시 정확한 것도 아닐 텐데 구태여 슬픈 일만, 아픈 일만, 어렵던 일만 복기하려고 바동거리기도 했다. 그래서 인지 어린시절의 몇 년은 뚝 잘라낸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내년에, 아니면 10년 후 나는 지금을 어떻게 기억할까. 철없던 어린 시절처럼 왜곡해서 꾸미거나 외면하지는 않겠지. 나이가 들면서 별 의미 없게 느껴지던 일상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매일 매일을 더 많은 추억들로 만들고 감사하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