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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집을 나갔다    
글쓴이 : 정용주    23-04-21 05:20    조회 : 1,419
   엄마가 집을 나갔다.hwp (17.5K) [2] DATE : 2023-04-21 05:20:40

1984년,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니 아빠가 겉옷도 벗지 않은 채 거실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아직 미처 해가 다 지지 않은 이른 저녁 시간에 집에서 만난 아빠는 낯설었다. 보통은 자정이 다 돼서야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이 된 언니와 초등학생인 동생까지 모인 다음에서야 아빠가 말씀하셨다.

“엄마는 지금 여행 중이다.”

아빠도, 우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엄마는 집을 나간 것이다.

“엄마, 왜 아빠랑 이혼 안 해요?” 나는 항상 이것이 궁금했다. 내가 보기엔 너무나도 현명하고 대단한 엄마가 아빠와 계속 사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엄마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다른 아줌마들과 다르다는 것에 은근히 우쭐대는 기분이 들었다. 하나라도 더 먹이려는 일반적인 엄마들과 달리 식탐 많은 사람은 싫다고 하는 것까지 좋아보였으니 연애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에게 단단히 콩깍지가 씌었다고 할만 했다.

하지만 수년간 부부 사이의 불화를 지켜 본 우리는 엄마가 이젠 지쳐서 우리를 떠났다고 생각했다. 아빠보다 훨씬 친한 우리에게 아무 말도 안하고 여행을 떠났을 리가 없다. 기다리면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밤마다 셋이 모여 걱정하며 잠든 지 한 달이 지난 후에야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날아 온 엽서에는 건강하게 잘 있다는 엄마의 소식이 들어있었다. 여전히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은 없었다.

엄마의 부재에 대처하는 방법은 딸 셋 모두 달랐다. 고등학생인 언니는 엄마의 대역을 자처했다. 언니는 맏딸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한 것인지,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커서인지, 강압적인 태도로 사감선생 노릇을 했다. 동생과 나는 엄마가 있을 때보다 더 괴로워졌다. 특히 동생과는 사사건건 부딪쳤다. 언니가 책임감에 짓눌려 있을 때 동생은 불리불안이 생겨버렸다. 소중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말도 없이 떠날 것 같은 불안감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결국 그녀는 대인관계에서 언제나 ‘을’을 자처한다.

무심한 성격의 대명사인 나는 처음에는 엄마의 부재에 무덤덤했다. 누군가가 엄마에 대해 물어볼까봐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학교를 다녔다. 친구들을 몰고 집에 와서 저녁때까지 놀았다. 아파트 아래층에서 항의 인터폰이 올 때까지 춤추며 논 적도 있다.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친구들은 항상 집에 있는 본인들의 엄마를 피곤해 했고 우리 집에서 자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엄마의 부재가 길어지면서 나는 점점 시니컬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무심해서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던 나는 뭐든 시비를 거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의 나의 별명은 쪽순이였다. 다른 사람의 어려운 처지를 불쌍히 여기거나 공감하기 보다는 나름 재치 있고 날카로운 혀로 자칫 약점일 수도 있는 지점을 아프게 후벼 팠다. 그리곤 무감하게 나의 잔머리를 기특히 여기거나, 내가 없는 소리를 한건 아니라며 자기 위안을 일삼았다. 내가 툭 툭 내뱉는 말 한마디에 상처받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말싸움으로 누군가를 울리는 일은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선생님과 어른들까지도 뻘줌하게 만드는 말빨로 모든 사람에게 일명 쪽을 주었다.

내가 평가하는 나는 한 마디로 쿨한 아이였다. 엄마가 없어도 기죽지 않았고, 삶에 대해 초월하거나 달관한 모습이었다. 나는 꼭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꿈도 없고 의욕도 없었다. 중학교 윤리시간에 20년 후의 나의 모습을 상상해서 쓰는 숙제가 있었는데, 그때는 내가 이미 자살을 선택해 세상에 없을 거라 썼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부잣집 5남매, 2남 3녀 중 첫째 딸로 태어났다. 위로는 큰 오빠와 아래 두 여동생, 그리고 막내남동생이 있다. 외할머니는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나온 수재 삼촌을 애지중지 하였고, 외할아버지는 맏딸인 엄마에게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고 한다. 엄마가 소학교 저학년 때는 예쁜 원피스를 사서 학교까지 찾아와서는 갈아입힌 적까지 있단다, 집에는 유모와 집안일을 건사해주는 집사까지 있어 학교에서 현장학습이나 소풍 등의 여행을 갈 때는 집사가 자전거 뒤에 태워갔다고 하니, 그 시대의 소공녀처럼 자랐다고 하겠다.

하지만 6.25를 겪은 이후 급격하게 기운 가세로 끼니를 걱정하고 외출복은 커녕 속옷도 살 형편도 되지 않았을 때 아빠를 만났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빠는 간신히 소학교를 마치고 혈혈단신 서울로 상경해서 신문배달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뒤늦게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자수성가를 한 사람이었다. 가장 극과 극의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공주처럼 자란 엄마는 시집와서 내리 딸만 셋을 낳고 죄인이 되었다. 삼대독자인데다 뒤늦게 부를 이룬 아빠는 홀어머니에게 인정받는 효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어려운 시집살이 중에 엄마는 든든한 자기편이 없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엄마 결혼 전에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는 아빠에게 생활비를 타서 쓰는 신세였다. 생활비뿐만 아니라 실은 외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집도 엄마가 신혼 때 지어 살던 집이었다.

친할머니는 평소 우리를 미워하셨다. 사실 미워했는지 싫어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할머니를 싫어했다. 그 당시 우리는 이름을 잃었다. 지 애비 등골 빼먹는 쓸모없는 계집애들일 뿐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할머니가 엄마를 불러 “3대 독자인 이 집안에 대가 끊기게 생겼으니 돈 200만원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돈만 주면 아들을 낳아주겠다는 사람을 찾았다는 것이다. 엄마는 순순히 따랐다. “만약 아들을 낳으면 제가 낳은 아이처럼 최선을 다해 열심히 키우겠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녀가 딸을 낳는다면, 그 아이는 어머님이 키우셔야 합니다. 저는 이미 딸이 셋이나 있거든요.” 이 일은 얼마 후 흐지부지 없던 일이 되었다. 어린 딸을 한번 안아주려고 해도, ‘정신 빠진 놈’ 이라는 할머니의 책망을 듣던 아빠는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갔다. 사업을 하던 아빠는 술을 자주 드셨다. 아침에는 일찍 출근하셨고 저녁에는 우리가 잠자리에 들 때까지 들어오지 않으셨다. 어쩌다 마주치면 몇 학년이냐고 물어보셨다. 딱히 이름을 부르시지 않았기에 지금도 가끔 의심이 든다. “혹시 내 이름을 모르는데 시치미 떼고 학년만 물어보신 건 아닐까?”

어느 새 할머니와 아빠가 한 편, 엄마와 우리 딸 셋이 그에 맞서는 한 편이 되어있었다. 엄마는 당신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깊은 우울에 빠졌다. 그리곤 얼마 후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훌쩍 떠났다. 십 수 년이 지난 후에야 엄마는 고백했다. 당시에는 다시 안 돌아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고...

엄마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석 달이 지나서 귀국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우리도 묻지 않았다.

아빠는 그동안의 자신을 반성하고 두 팔 벌려 엄마를 환영했고, 우리도 오랜 기다림 후에 엄마가 반가웠을 뿐 원망을 쏟아 내거나 불평한 적이 없다. 우리 가족은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태연하게 지냈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을 가슴 한 켠 아주 작은 공간에 깊숙이 구겨 넣어 두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누구에게도 기대고 싶지 않았고, 누가 나에게 기대는 것도 원치 않았다. 좋아하던 사람도 단칼에 정리할 수 있었고, 온 마음을 다 바쳐 사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하루의 일상은 농담 따먹기처럼 가볍게 넘기고, 혹시라도 진지한 이야기가 나올라 치면 얼렁뚱땅 딴소리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돌아온 엄마는 지난 날을 반성하고 새로 태어난 남편을 얻었다고 한다. 더 이상 아들 못낳은 죄인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청소년기의 나는 엄마처럼 세계를 누빌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여자라는 이유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라났다. 사춘기의 우리들은 엄마의 부재로 각자 큰 영향을 받았다. 제일 어렸던 동생은 입안의 혀처럼 부드럽고 서비스 정신 강한 싹싹한 성격으로 변모했고, 장녀인 언니는 솔선수범과 책임감 강한 여전사 타입으로 자라났다. 나 또한 자주적이고 독립적이면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서도 중립적인 사람으로 변모했다.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그리 길지 않은 석 달간의 경험이 내 잠재의식 속에 스며들어 나도 모르게 나를 변화시키고 발전시켰다. 하지만 세 자매가 만나 그때의 일을 이야기 하다 보면 엄마의 가출은 각자에게 큰 상처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상처를 메우고 보듬는 과정에서 겪은 성장통은 여전히 흉터로 남아있고, 내가 싫어하는 나의 안 좋은 모습으로 발현되곤 한다.

어느덧 88세가 된 노모를 보니 그 시절 트라우마를 핑계로 계속 어리광부리는 것은 이제 그만 해야겠다. 좋든 싫든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이 쌓여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이제는 이해하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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