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이 울렸다. 낯익은 이름. 트루디였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수화기 너머로 낮게 가라앉은 트루디의 음성이 들려왔다. “유리안나가 하늘나라로 갔어...”
우리 가족이 아무 연고도 없는 캐나다로 이주했을 당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유리안나였다. 다문화센터 코디네이터였던 그녀의 업무는 정착이 필요한 캐나다 신규이민자들에게 멘토를 소개해 주는 일이었다. 보스니아 내전으로 인해 19살의 나이에 캐나다로 건너왔다는 그녀는 이민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에게 다정하고 자상한 중년여성 트루디를 소개해 준 것 역시 유리안나였다. 유쾌하고 화통한 여장부 스타일. 어릴 적 살던 동네의 젊은 통장 아줌마 같다고나 할까? 유리안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1층 오피스에서 이야기를 나눠도 복도 끝까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목청이 컸으며, 특유의 친화력으로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도 쉽게 다가가는 호인이었다.
첫 번째 만남 이후 우리의 관계는 오로지 전화통화로 이어져갔다. 유리안나는 이따금 전화를 걸어와서 자신이 연결해준 멘토와 계속 교류하며 도움을 받고 있는지, 무슨 도움을 받았는지 확인하곤 했다. 하지만 사실상 우리의 대화는 그저 단순한 아줌마 수다에 가까웠다. 어쨌든 그녀와의 수다는 언제나 반갑고 즐거웠다. 그러다 6개월쯤 지나 우리가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녀는 머리에 화려한 꽃무늬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미 몇 년 전에 완치 판정을 받았던 유방암이 재발했다고 했다. 독한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을 다 잃었지만, 값싼 동정이 당치 않을 만큼 그녀는 여전히 씩씩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다시 6개월 후,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우리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이 이뤄졌다. 나는 검은 정장을, 트루디는 남색 원피스를 입고 식장에 들어섰다. 커다란 스크린에 그녀의 생전 모습이 슬라이드로 돌아가고 있었다. 첫 화면에 적혀있는 문구 [Celebration of life]... ‘Celebration’이라는 단어가 다소 생소하게 느껴졌다. 뭔가를 축하하거나 기념한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살아생전 고인의 아름다운 인생을 되새겨보는, 새로운 개념의 장례이리라.
스크린 위로 병실에 있는 유리안나의 모습이 흐른다. 엄마의 침대로 뛰어들어 얼굴을 어루만지는 어린 두 딸과 아내의 민머리도 사랑스럽다는 듯 입을 맞추는 남편의 모습. 곧이어 병실 침대 위에서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유리안나가 보인다. 슬퍼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다. 오히려 편안한 모습이다. 악보 없이 연주하느라 자꾸 실수를 하여서인지 멋쩍게 웃는다. 그리곤 잠시 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카메라를 향해 작별 인사를 시작한다. 맺혔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하지만 그녀 입가의 미소는 여전히 해맑다.
화면이 꺼지고 단상 위에 그녀가 활동했던 우쿨렐레 동호회의 회원들이 등장한다. 유리안나의 남편과 무릎까지 오는 하얀 드레스 차림의 큰딸도 함께다. 영상에서 유리안나가 연주했던 그 곡. 구슬프지 않고 흥겨운 분위기의 음악이다. 이제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나 마지막 인사를 하는 시간이다. 많은 이들 앞에 서는 게 익숙치 않아 눈치만 보는 나와는 다르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줄을 선다. 개중에는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담담하게 미리 준비해온 편지를 읽는다. 마지막 인사가 끝나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혹시나 조위금을 낼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조위금 대신 살아생전 유리안나가 후원해왔던 유방암 예방협회에 기부금을 내달라는 것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두어 번 장례식에 가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외할아버지의 장례와 결혼하자마자 겪은 시댁 숙부님의 장례다. 외할아버지 장례식은 너무 어렸던 탓에 장지까지 따라가서 울었던 것과 이모가 울다가 기절했던 기억들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시숙부의 장례는 장례식장이 아닌 큰댁에서 치렀다. 나는 평상복 위에 하얀 소복을 겹쳐 입고 문상객들에게 육개장을 날랐던 것과 피곤해서 잠시 잠이 들었을 때 시아버지가 크리넥스 박스를 베개 대신 베어주신 기억만 난다.
내가 아는 한국의 장례식은 망자의 지인보다 상주의 지인들이 대부분인 행사였다. 친분을 떠나 상주와 비즈니스 관계에 있는 이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참석하곤 했다. 그날은 무조건 슬픈 날로 간주 되었고 그에 걸맞은 태도를 요구했다. 고인의 삶이 얼마나 충만했던, 얼마나 행복했던 가와 상관없이 무조건 눈물로 애도해야 했다. 장례식날은 상부상조의 날이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경조사에 와주는 것 자체가 신세를 지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서로의 경조사에 참석하는 것이 일종의 당연한 기브앤테이크가 되어버렸다. 행여나 그 책무를 망각할까 방명록을 마치 외상장부처럼 고이 보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수십 년 전 이야기.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고 들었다. 생면부지의 부장님 빙모상에 단체로 끌려가는 일도 드물뿐더러 장례식장을 생전 고인의 취향대로 꾸미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인간답게 죽을 권리와 아름다운 마무리에 대한 성찰이 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제 나는 나의 장례를 생각해 본다. 만약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 생을 마치게 되더라도 내가 알던 장례 문화를 따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유언으로 내 나름의 장례식을 요청하겠지. 하지만 나의 마지막 순간은 지금 살고 있는 캐나다에서 맞이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래서 가만히 혼자 상상해 본다. Celebration 행사에서 본 유리안나의 얼굴을 내 얼굴로 바꾸어본다. 그녀처럼이나 겸허하고 담담할 자신은 없다. 그럼에도 떠나는 나와 남겨진 이들이 함께 웃으며 작별할 수 있다는 게 역시나 그 어떤 장례식보다 아름답다. 모든 탄생에는 죽음이 따르기 마련. 할 수 있다면 미리 준비를 해두는 편이 낫다. 그리고 나의 선택은 [Celebration of life]. 죽음을 비통해만 하기보다는 탄생과 죽음 사이 찬란했던 모든 순간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celebrate 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