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사 여정
조해영
한여름 끝자락, 소양강 부근에 자리한 천년 사찰 청평사를 찾았다.
십여 년 전 이 근처에 와 살게 되었는데 운전 중 청평사 이정표를 보게 되었고 예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이십대였던 초겨울, 직장동료들과 지금은 없어진 경춘선 무궁화호를 타고 춘천에 여행 왔었다. 소양강 댐에서 배를 타고 청평사로 향하던 우리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계획을 바꾸는 바람에 청평사 구경은 하지 못한 채 되돌아 간적이 있다. 청평사까지 한 이십 여분 더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힘도 들고 당일치기 일정이 너무 빠듯할 거 같다는 이유였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기 아쉬웠지만 유람선을 타고 강바람을 쐰 것으로 만족하며 발길을 돌렸다.
청평사 이정표를 볼 때면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한번 가봐야지 하던 것이 십년이 지났다. 선뜻 가기로 마음먹은 그 즈음 나의 마음은 편치 못할 때였다. 그때 떠오른 곳이 청평사였다.
청평사 가는 길은 수로 외 육로도 있어 머리도 식힐 겸 차를 몰고 청평사로 향했다. 육로로 가는 길이 제법 꼬볼꼬볼하고 으슥하게 느껴진다. 이 길이 맞나 청평사가 나오기는 하는 건가 미심쩍어 차를 돌릴까 하다 끝까지 가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좀 걸어가면 청평교-출렁다리가 나온다. 다리위에서 내려다보는데 산에서 흘러 내려와 강으로 흐르는 물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소박한 풍경에도 오랜만에 접하는 경치여서인지 기분이 좋아진다. 소양강 물줄기를 보면서 소나무 가로수가 그늘이 되어주는 길을 걸어간다. 입구를 지나 청평사 가는 길은 산과 계곡 사이를 걸어 올라가야 한다. 수백 년은 족히 넘을 나무들이 세월의 흔적 따라 이리 휘고 저리 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잘도 버티어 길을 내어준다. 좌측엔 산과 나무가 우측엔 계곡물이 흐른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한낮의 더운 열기도 사라지고 시원하다.
청평사 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수로를 따라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인가? 모르는 사람들과 동행 아닌 동행이 되어 청평사에 오른다. 혼자, 자매들과, 연인과, 겨우 걸음마를 뗀 듯 한 아이를 데리고 가는 부부 등 각자의 목적과 기분을 느끼며 향하는 듯하다. 앞에 두 따님과 동행하는 아버지가 보인다. 힘든 기색 없이 씩씩하게 걸어가는 아버지와 달리 뒤처지는 딸들은 벌써 기진맥진해 보인다. 다 큰 딸들과 동행하고 있는 아버지가 외롭지 않은 가장의 모습으로 보인다. 나도 생각지 못한 산행이지만 예전의 등산실력을 발휘하며 가볍게 오른다. 천년의 세월과 전설을 간직한 곳인 만큼 오르는 동안 궁금증과 설렘을 느끼면서.
청평사 가는 길에 볼거리가 있다. 청평사 설 화속 주인공인 ‘공주와 상사뱀상’이 계곡아래 있다.『당나라에 공주를 사모한 청년이 있었는데 왕이 청년을 죽이자 상사뱀으로 환생해 공주 몸에 붙어서 살았다. 공주는 뱀을 떼어내려고 방랑하다 청평사에 이르게 되었다. 계곡 옆 굴에서 하룻밤을 자고 계곡물에 몸을 깨끗이 씻은 후 주지스님께 가사(스님옷)를 만들어 올렸다. 그 공덕으로 상사뱀은 공주와 연을 끊고 해탈하였다.』 라는 전설이다.사모한 게 뭐 큰 죄라고 죽이기까지, 환생을 할 거면 멋진 왕자로 태어나지, 하필이면 혐오와 고통을 주는 뱀이 되어 공주 몸에 붙어 있다니 복수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결국 공주 공덕으로 해탈하는 결말이 마음에 안 드는 난 해탈이 덜 된 건가?작가의 꿈을 이루어보겠다고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있던 터라 공주설화를 모티브로 절절하고 행복한 결말의 소설 한편 구상하며 청평사에 오른다. 천 년 전으로 돌아가 상상의 나래를 편다. 처음 시작과는 달리 진부한 내용과 결말에 ‘역시 소설쓰기는 어려워’ 라며 생각하며 피식 웃음이 나온다.
오르는 길에 소원을 비는 돌탑들이 소박하게 올려져 있다. 나도 하나 올려본다. 서두르지 않고 지금을 오로지 느끼며 오른다. 어느새 편치 않던 나의 마음은 풍경과 동화되어 평온해졌다.
‘구송폭포’가 보인다. 폭포 주변에 소나무 아홉 그루가 있다하여 구송폭포라 한다. 또는 오봉산에서 흐르는 계곡 물줄기가 새소리, 물소리, 낙엽소리, 바람소리 등과 어우러져 구성지게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하여 ‘구성폭포’라고도 한다. ‘구성폭포’가 시적으로 느껴져 마음에 든다.폭포아래에 중년 연인의 모습이 보인다. 멋진 포즈를 취하고 발을 담그고 다정한 모습이다. 나도 내려가 폭포를 가까이서 보고 싶지만 방해될까 망설이고 있는데 다른 분들이 폭포로 내려간다. 이때다 싶어 따라 내려간다. 폭포는 강단 있게 내리꽂는 물줄기가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 크고 깊은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짙은 푸른빛이 한발 물러서게 할 정도로 위엄 있다. 올라와 폭포를 내려다보는데 위에서 보는 것이 더 장관이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오르는데 어디선가 피리소리가 들린다. 새소리도 아닌 피리소리라니 궁금해 하며 찾아가는데 은빛 수염의 중노인이 계곡을 바라보며 피리를 불고 있다. 두어 분이 피리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피리소리가 왠지 구슬프게 들림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긴다.
청평사 연못 ‘영지’가 나온다. 쉬어갈 겸 가까이 가본다. 부부로 보이는 한 쌍이 나무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남편이 먼저 차분한 억양으로 ‘내가 기분이 안 좋았던 건’ 하며 말을 꺼낸다. 열려있는 귀이기에 자연스럽게 부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갈등이나 오해가 있었는데 청평사에 와서 생각할 기회를 갖고 대화로 풀어보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해 본다. 여행하는 기분으로 사찰을 방문하며 시작하는 대화는 좀 더 편안하고 마음의 정화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청평사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다. 흐르는 대로 흐르는 풍경과 각양의 사람들에 사연이 얹어지면서 이야기가 더해지는 듯하다.
청평사에 다 왔나 했더니 삼층석탑, 진락공 이자현 부도가 보인다. 맞은편에 중간 안내소가 있다. 좀 전에 본 아버지와 동행하던 딸이 안내소 직원에게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묻는다. 힘든 모양이다. 몇 걸음만 더 올라가면 다다르는 곳이었는데 나 역시 언제 도착하나 힘들 때였다. 딸들이 앞으로 아버지와 여행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나? 나도 모르게 전에 없던 오지랖을 떨어본다.
천년사찰 청평사가 다리 하나만 건너면 도착이다. 이끼가 낀 다리에서 올려다보는 계곡 골짜기가 신비롭게 보인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천 년 전 시간 속으로 들어갈 것만 같다. 드디어 청평사를 마주할 시간이다. 한발 한발 돌계단을 올라 마주한 전경에 ‘와’ 가 저절로 나온다. 운동장만한 절마당을 지나 두 그루의 나무가 보디가드 한 가운데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그러면서 귀품 있는 청평사가 떡하니 자리했다. 그 너머로 오봉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 그 위로 하늘이 펼쳐져 있다. 한 폭의 풍경이 한눈에 사진처럼 찍힌다. 삼삼오오, 가족단위, 연인, 혼자, 다양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무 그늘진 의자에 앉아 땀을 식히며 청평사 전경을 바라본다.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아 잠시 감상해 본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찰 구경에 나서본다.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 정중앙의 회전문을 통과한다. 이층으로 된 경운루 천장에 소원지가 빽빽이 매달려 바람에 나부낀다. 어떤 소원을 적었는지 하나하나 보는데 ‘가족화목’, ‘건강’, ‘사업번창’ 등이다. 거의 절반의 소원이 가족화목과 건강이다. 산바람에 소원지 하나가 땅에 떨어져 나풀거리고 있다. 바람에 날아가 버리기라도 할까봐 안내소를 찾았는데 직원이 없다. 돌멩이 하나를 주어 경내 한쪽에 지지해 놓으면서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란 생각이 잠깐 스친다. 대웅전 앞에서 처음으로 두 손을 모아 절을 했다. 방문객으로서 예의를 표하고 바람 하나 빌었다. 천년사찰 청평사를 소소한 모양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꼼꼼히 감상한다. 천년 가까이 된 주목나무의 위엄한 자태가 그저 경이로 울 뿐이다. 경내 옆으로는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가지런히 흐르도록 물길을 만들어 놓았다. 조그만 텃밭에 잘 가꾸어진 채소들이 이것저것 조금씩 심어져 있다. 사찰 식구들의 조촐한 식사를 위한 딱 필요한 만큼씩인 듯 했다. 채소들은 보기에 어느 꽃 못지않게 예쁘다.
오랜 세월 돌아서 마침내 방문한 청평사 구경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이다. 올라오는 사람들과 스쳐 지나간다. 길가 벤치에 남자 아이가 누워있다. 옆으로 누워 한쪽 손을 턱에 괴고 있는데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어른들과 동행한 아이가 씩씩하게 먼저 올라와 쉬고 있는 거겠지’,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편하게 드러 누울 수 있을 때가 좋을 때다’ 란 생각이 들며 꼬마의 모습이 귀엽고 대견하다. 내려오는데 꼬마의 일행으로 보이는 어른들이 힘에 부친 듯 천천히 오르며 한마디씩 한다 ‘쟤 좀 봐, 벌써 가서 저기 누워있어’ 라고 말하는데 흐뭇해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내려가는 발걸음은 재촉하지 않아도 통통거리며 속도를 낸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도 같고 가벼워진 것도 같고 굳이 힘이 들어가지 않아도 잘도 내려간다. 오를 때는 힘들어도 내려갈 때는 쉽다 못해 조절에 어려움을 느끼며 이런 경우를 인생길에 비유한 말이 떠오른다.
앞에서 작고 삐쩍 마른 강아지가 중년 남자와 함께 내려가고 있다. 주인의 발걸음에 맞춘 건지 기울어진 작용에 의한 건지 잰걸음으로 내려가고 있다. ‘강아지가 힘들겠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말했다 바로 그때 뒤에서 들려온다. ‘강아지는 힘들 거야, 날도 더운데’, ‘저 발 좀봐, 내려가기 바쁘네’ 여자 일행이 강아지의 모습을 보고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는다. 앞서가던 반려견 주인이 강아지를 안고 내려간다. 아마 뒤에서 주고받는 말을 들은 모양이다. 반려견에게는 잘된 것인지, 아님 안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일행이 있었다면 나도 속마음을 말로 했을까? 소리인 ‘말’이라는 것이 작은 소리여도 다른 소음에 섞일지라도 또렷이, 아니면 어렴풋이 당사자에게 전달되기도 한다.
청평사 방문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고 갈증을 식히러 카페에 들어갔다.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셔야지 했는데 ‘더덕쥬스’가 보인다. 언제부턴가 여행지에 가면 그곳만의 색다른 것, 시그니처를 먹어본다. ‘더덕쥬스 한잔 주세요’ 햐얀 더덕 원액에 여린 초록색 허브 잎이 두어 장 얹어졌다. 보기에 싱그럽다. 더덕 특유의 쌉쓰름한 맛이 향긋하고, 당을 더해 달콤하기까지 하다. 너무 과하지 않고 딱 적당한 맛이다. 알맞게 걸쭉한 더덕원액이 출출함도 살짝 채워주며 든든하게 차올랐다.
녹음이 짙고 화창했던 날씨와는 달리 마음이 흐릿했던 날에 청평사를 찾았다. 오랜 세월 묵묵히 버텨온 풍경과 그곳을 찾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사색의 기회를 가졌다. 어느새 답답했던 마음도 잊고 눈앞의 광경을 마주하며 즐길 수 있었다. 큰 기대없이 갑자기 찾아갔던 곳, 무심히 흘려버릴 수 있는 소소한 현상도 의미있게 다가왔던 청평사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