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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글쓴이 : 김수진디지털대반    23-07-03 10:14    조회 : 2,542
   너무늦게깨달아버린.hwp (92.5K) [1] DATE : 2023-07-03 10:14:09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김수진

 

 꽁꽁 얼어버린 겨울밤, 고요한 아파트 단지에 찹쌀떡 장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찹싸알 떠~.”

 초저녁잠이 많아 일찍 잠자리에 든 시아버지가 방에서 나왔다. 화장실 가려고 일어났나보다 생각했는데 베란다 쪽으로 가더니 창문을 황급히 열며 소리쳤다.

 “여보쇼 양반! 여 좀 와보시요.”

 찹쌀떡 장수는 둘러메고 온 네모난 상자를 열었다. 떡을 덮고 있던 비닐을 걷으니 눈송이 같은 찹쌀떡이 꽉 차 있었고, 찹쌀떡 아저씨는 아버지를 향해 먹을 만큼 집으라고 손짓을 했다. 시아버지는 투박한 손으로 찹쌀떡을 꺼내어 가족들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애기도 찹쌀떡 좋아하쟈?”

 막내며느리에겐 젤 큰 놈을 줘야지 하며, 찹쌀떡 장수에게 야가 내 며늘아가요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저 냥반이 변했다고 샐쭉 웃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가가 허옇게 되는지도 모르고 한입 가득 베어 물고는 서로의 모습이 우스워 하얀 전분 가루를 뿜으며 밤이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따뜻했다. 사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유명한 노랫말처럼 어릴 적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다. 남들 다하는 외식조차 하지 못할 때, 엄마는 순전히 아빠 때문이라 했다. 내가 본 아빠는 처가 식구들에게 기가 죽어있는 약한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성실했지만, 보증을 잘못 서서 파산한 적이 있었고 사기를 당해 가게가 넘어갔고 파친코라는 도박에도 손을 대서 엄마의 가슴을 후벼팠었다. 엄마는 슬퍼하는 날이 많았고 맏딸인 나에게 하소연하며 아빠 원망을 늘어놓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의 유소년기는 반짝 볕 드는 날이 묻힐 만큼 캄캄한 날이 많았다. 엄마를 힘들게 하는 아빠가 좋을 리 만무했다.

 

 아빠가 세 살 때, 할머니는 남편과 사별하고 몇 해 뒤 재혼을 했다. 아빠는 가족이 생겨서 좋았겠지만, 새아버지는 아빠가 탐탁지 않았나 보다. 새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빠는 자식에게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몰랐다. 나는 아빠를 답답하다고만 했지 가엽게 여기지 못했다. 아빠는 장남이라는 이유로 새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낳은 동생 다섯을 살뜰히 돌봤다. 엄마가 결혼할 때 막내가 5살이었다고 하니, 엄마의 고단함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틈만 나면 환영도 받지 못하는 할아버지 집에 가서 시골 일을 도왔다, 아무리 노력한들 여전히 할아버지 눈엣가시인 아빠를 보면 화가 났다.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투병 중일 때도 할아버지 곁에 밤낮으로 머물던 사람은 당신 핏줄이 아닌 아빠였다. 그때도 동생과 난 화를 내며 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아빠는 인간은 도리만 하고 살면 된다.” 하였다. 그러는 동안 엄마는 아빠 대신 생계를 꾸리며 가장의 역할까지 해야 했다. 점점 더 아빠가 미웠다.

 

 나는 결혼 직후부터 남편이 출근하면 시아버지와 동네 산행을 했다. 나지막한 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시아버지는 케케묵은 옛날이야기부터 남편의 학창 시절 이야기까지... 소재 거리도 다양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에게 속엣얘기를 줄줄 털어놓게 되었다.

 “아버지. 전요 아빠 때문에 너무 속이 상했어요.”

 “우리 사둔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데, 애기가 그럼 못써. 잘해드려야지하며 말을 이어갔다.

 6.25 참전용사였던 시아버지는 홀로 남한에 정착해서 아홉 살 아래 어머니를 중매로 만나 바로 살림을 차렸다고 했다. 그땐 지금처럼 마누라 위하는 걸 모르고 살았다고, 큰애 낳고 몸조리도 못 하고 양동이 이고 밭에 가다가 넘어져서 허리를 다쳤는데, 치료를 제때 안 해서 시방까지 고생한다고 할마이한테 빵점짜리 남편이라고 미안하다 했다. 사남매 학교 한번을 안 가봤고, 운수회사 하던 게 망해서 할마이가 식당 일 하느라 욕봤다며, 그리 고생했는데 어느새 할마이가 되어 버렸다고 가는 세월을 허망해했다. 아버지가 내 맘 풀어주느라 과장되게 말을 했을 수도 있지만, 아버지 목소리가 간간이 떨리는 걸 느꼈다. 처음으로 아빠가 보고 싶었다. 미워만 했던 아빠의 애달픔을 이젠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가 식구들을 잘 챙기는 남편의 배려로 아빠와 짬짬이 시간을 보냈다. 감정 표현이 확실한 엄마와는 달리, 아빠는 수십 평생 당신 의사도 제대로 표현 못 했던 사람이라, 먹고 싶은 거 있냐 물어도 난 아무거나 잘 먹으니 니들 먹고 싶은 거 먹어라 했다.

 새우 철이었던 가을 어느 날, 소금 깔린 팬에서 팔딱팔딱 뛰어오르는 새우를 보며 아빠가 목젖이 보일 만큼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런 아빠를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본인 모습이 쑥스러운지 바닷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을의 붉은빛이 아빠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 번지고, 때마침 불어온 갯바람에 노을이 날려 내 눈에 담겼다. 나도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동화의 해피엔딩처럼 우리 가족의 행복도 영원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원치 않는 미국행을 해야 했다. 그래도 내가 자주 한국에 들어가면 되고 부모님들이 미국으로 여행 오시면 그럭저럭 살 만할 것 같았다. 막상 미국에 오니 여러 가지 상황들로 한국에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아빠가 외출을 나가서 연락이 끊기는 일이 많아졌는데, 급기야 며칠 전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단다. 알고 보니 아빠는 내가 미국 가기 직전에 살던 동네에 가서 나를 찾고 있었다. 떠나간 딸을 아빠는 놓지 못했다. 아빠는 기억을 잃어가는 병이 생겼는데도 딸과 함께한 추억은 붙잡고 있었다.

 집을 자꾸 나가는 아빠는 얼마 후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면회 간 엄마가 전화기를 아빠에게 넘겨줬다.

 “아빠 아픈 곳은 없어요?”

 “진아! 지금 새우 철이냐? 우리 서해로 새우 먹으러 가야지?”

 울지 않으려 했지만 목이 메였다.

 생각해보니 아빠는 당신 나름의 사랑을 표현했다. 하고 싶은 말을 편지로 전했다. 사업이 망해 아빠와 떨어져 살던 어린 시절, 쿰쿰한 지하실 방이 창피한 딸에게 미안하다고 편지를 보냈고, 신혼여행 후 새 보금자리에 도착했을 때도 잘 살아라. 당부하는 편지가 먼저 와있었다. 내가 미국으로 이주하고 집 근처 성당에 다닌다는 걸 안 아빠는 성당 게시판에 딸을 잘 부탁한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자식을 생각하는 방법과 표현 방식이 다른 건데, 나는 사랑의 깊이를 못된 기준으로 잣대질했었다.

 너무 늦게 깨달아 버, 여전히 어리석은 나는 노력하려 한다. 살아가는 방식에 정답은 없겠지만 아빠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의 도리를 지키고, 순리라는 그릇이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정도를 잘 담으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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