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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인종 길게 울리면    
글쓴이 : 이필자    23-11-12 10:47    조회 : 1,792
   초인종 길게 울리면.hwp (19.0K) [0] DATE : 2023-11-12 10:47:01

   초인종 길게 울리면

 

 때론 비 오는 주말이 좋다. 마음 편하게 쉴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역마살도 잠재울 수 있다. 만사 제쳐놓고 쉬고 있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우리 집 현관 초인종, 자동으로 바뀐 지 오래다. 평소보다 오랫동안 울리는 소리. 누구일까? 모 종교단체 아주머니들이다. 오랜만에 길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니 새삼 생각나는 일이 있다.

 우리 애들 어렸을 때다. 아파트 입구에 喪中이라고 붙어 있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20년 전만 해도 장례 예식장이 없었던 시절이라 아파트에서도 장례를 치렀다. 순간 스치는 불길한 예감. 혹시 그 할머니 아닌가? 몇 호에 초상이 났는지 다른 사람들도 잘 몰랐다. 내 예상이 맞았다.

 작년 늦가을이었다. 허리가 거의 기역 자에 가까울 만큼 굽은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놀이터 옆 공터에서 걷는 연습을 한다. 햇살이 따뜻한 오후가 되면 매일 보였다. 거의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파르르 떨리면서 내딛는 한 발, 한 발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든다. 뒤꿈치가 닳은 검정 털신, 곧 부러질 것 같은 막대기 지팡이도 지쳐 보인다.

 찬바람에도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마치, 걸음마를 하는 아기처럼 불안하고, 힘들어 보였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할머니의 사연은 모르지만, 옆에서 팔이라도 잡아 드리고 싶었다. 그건 보는 내가 편하자고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한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문에 딸 집에 가서 일하다가 넘어져서 그리되었다고 한다. 아들 집에 사는 할머니 입장이 난처하다는 말들이 파다하다. 혹독한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걷기 연습하는 것을 난 가까이서 바라만 보았다.

노력한 만큼의 효과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젠 지팡이 없이 혼자서도 아주 천천히 걷는다. 하지만 힘든 육체적 고통 뒤에 온 후유증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정신이 약간씩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집을 찾아가질 못했다. 엘리베이터를 타서 9층을 누르지 못해 다시 열리면서 내린 1, 같은 방향인 우리 집이 할머니 집이 되었다. 몹시 피곤해서 잠깐 휴식을 취할 때, 아이들과 공부하는 시간, 손님이 왔을 때도 참 많이 벨이 울렸다. 빨리 문을 열지 않으면 손으로 막 치기도 했다.

 

 우리 집은 지나는 사람 모두의 초인종일 경우가 많다. 만취가 되어 아예 초인종에 기대고 서있으면 식구들은 시간대를 막론하고 동시 기상이다. 요즘은 아파트에 아이들이 적어서 남의 집, 특히 1층 벨 누르고 도망가는 경우는 많이 줄었다. 그 녀석들 잡겠다고 식식거리며 튀어 나가는 아들들 모습도 점차 보기 드물었다. 우리 가족은 이 소리에 상당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젠 초인종 소리만 들어도 할머니를 구별할 수 있다. 애들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면, 아들에게 할머니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한다. 애들이 없으면 그 일은 나의 몫이다. 짜증보단 측은함과 안타까움이 앞섰다.

훗날, 내 모습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렇게 모셔다드리고 나면 할머니는 자식한테 원망을 듣는다는 소문이 나를 더욱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아들 입장에서 보면 이해도 된다. 그걸 바라보는 자식도 편하지만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던 할머니가 한 달가량 보이지 않아서 궁금했는데. 가셨다. 그토록 찾던 당신의 영원한 집으로. 이젠 더 이상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지 않아도 된다. 초상집치고는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새마을 금고에서 온 화환 하나만 아파트 입구에 덩그러니 서 있다. 화환 수와 자식들 출세를 비례시키는 나의 속된 근성도 꾸짖어 본다. 장례식 아침에서야 할머니 며느리가 누군지 알았다. 이웃과 무관심한 우리들의 삶, 아파트 생활에 환멸을 느끼는 순간이 이런 때겠지.

 

 “엄마, 내가 잘못 했어.” 몸부림치는 딸의 모습에서 팔순 지난 친정 노모가 갑자기 그리워 함께 울었다. ‘난 저렇게 울어줄 딸도 없는데

늦잠 자는 아이들을 깨웠다. 그동안 할머니와 인연이 있기도 하고, 삶과 죽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싶었다.

엄마 아빠도 언젠가는 저렇게 죽는단다. 부모님 살았을 때, 잘하고 한 번 사는 세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신에게 할 말을 아이들한테 하고 있었다.

 

 문득 생각나는 말이 있다.

우린 본래의 집에서 잠시 소풍 나왔다고, 소풍 잘 마치고 이쁜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 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하다.”

고 하신 본당 노신부님의 말씀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오늘따라 가슴 한가운데를 겨냥했다.

할머니! 이젠 편히 쉬세요. 그곳이 당신 집이에요.

주님! 지금 당신께로 간 그 영혼을 잘 거두어 주소서.’

 

 조금 전 그 아주머니들, 따뜻한 차 한 잔이라도 대접할걸. 종교가 다르다고 그냥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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