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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글쓴이 : 제인아    23-12-13 11:54    조회 : 2,346


                            시작

                                                                           제인아    

  


 글쓰기 반에 등록한 건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래전 글짓기로 몇 번 상을 받은 적이 있다는 무심한 기억과 본래 사람이란 자기가 믿는 구석에 의지하기 마련이듯 그렇게 클릭 한 번으로 성사된 일이었다. 무얼 하든, 어디를 가든 생각이 많아 결정하기까지가 쉽지 않은 내가 무언가에 홀린 듯 주저함이 없었던 것도 참 오랜만의 일이다.

 초등학교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특별히 한 일도 없이 차곡차곡 미뤄두었던 숙제들. 그중 탐구생활, 만들기, 독후감은 어느 방학에나 꼭 있는 숙제였다. 탐구생활 속 식물채집은 어렵지 않은 숙제였으며 꽤 재밌었다. 지천에 널린 것이 풀이었고 이름을 쓰고 설명 한두 줄 붙이는 것은 내가 알거나 어머니가 알거나 아니면 백과사전이 있으니 일도 아니었다. 풀내음이 좋았고 아직 흙이 남아 메마르지 않은 잔뿌리에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쓰여 그렇게라도 꼭 붙어 있길 바라며 테이프로 싸매고 또 싸맸다. 괜한 짓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동네 여기저기 발품을 팔다 보면 버려진 널빤지며 나무토막들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는데 몇 개를 주워 와 뚝딱 만든 모형 이층집이 출품되고 당선이 되던 재주가 있었으니 만들기 또한 하기 싫은 숙제라기보다 즐거운 놀이에 더 가까웠다

 문제가 되는 건 늘 독후감이었다. 책을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원고지 열 장 정도의 글도 써야 했으니 이중고였고 골칫거리였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기 일쑤였는데 새 학기가 주는 설렘보다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중압감은 그즈음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통과의례였다. 제때 하면 될 일을 참 아둔했다. 개학 날 이 아이 저 아이의 손을 타며 교실을 돌아다니던 어느 용기 있는 자의 독후감은 열 장 중 여덟 장이 책의 뻔한 줄거리로 채워졌다. 한두 장 정도만이 누군가의 권유에서우연히 들렀던 서점에서, ‘참 재밌었다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다, ‘감동적이었다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등으로 각자 자기만의 스타일로 윤색되는 것을 개학 날마다 지켜봐야만 했다. 세상 참 쉽게 산다 싶어 한심하다 했는데 새 학기 첫날이면 으레 일사불란하게 벌어졌던 그때의 소동들이 지금의 나에게는 사뭇 그립기까지 한 추억으로 변해 있다.

 하기 싫은 숙제여도 나에게는 독후감을 대하는 나름의 원칙이라는 게 있었다. 책은 속독으로라도 읽어야 했고 줄거리는 생략했다. 사소한 장면 하나에 열한 살 인생에 다시없을 영감을 받은 듯 의미부여를 해야만 했다. 뻔한 게 싫었고 평범함이 재미없게 여겨졌던 때다. 또 만약에 내가 주인공이라면 나의 소중한 목숨을 다른 이들의 목숨과 바꾸는 어리석은 짓은 절대 하지 않을 테지만 주인공의 대의를 위한 희생정신만큼은 가히 존경할 만하다 등 억지와 사실이 뒤섞인 온갖 기교를 동원하느라 시간도 많이 걸렸고 머리도 아팠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기어코 사서 고생인 내가 친구들보다 훨씬 더 미련해 보였다. 그러나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더러 맞을 때도 있어 우여곡절 완성된 독후감이 나에게 또 한 번의 상을 안겨 줬으니 친구들이여 머리를 굴린 만큼 상도 굴러 들어오는 법이라고. 언제나 승자는 시간을 좀 더 투자하고 머리를 조금 더 쓴 자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고만고만한 또래들 머릿속이 오십보백보일 터 흔한 글 한 편에 무슨 특별함이 있었을 리 없다. 오히려 상을 줘야 하는 선생님의 고민이 더 컸을 것이다.

 이후 상이 계기가 되었는지 갑작스레 문예반에 뽑히게 되었다지원한 적이 없는데 얼떨결이었다.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일이 많았는데 선생님이 가라면 가고 하라면 하던 시절이었다. 내키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 걸스카우트는 그해 새로 바뀐 베레모와 원피스로 구성된 단복에 매료되어 자석처럼 이끌리듯 입단하게 되었고 가끔 보이스카우트와 조인join하는 재미도 있어 졸업 때까지 삼 년을 했다. 어디로 튈지 몰라 공만큼 세상에 무서운 게 없던 내게 탁구부도 모자라 백 미터 달리기 18.6초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언니와 남동생에게 내내 놀림을 받았던 내가 육상부라니. 겨울방학 내내 등교해 훈련에 참여해야 했는데 도대체 왜 뽑힌 거예요? 하기 싫어요.’ 소리는 못한 채 사흘이 멀다 하고 결석이 잦았던 내게 체육 선생님은 단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린 적 없이 늘 다정했다. 오히려 방학이 끝난 후 담임 선생님을 통해 추운데 열심히 나와 줘서 고맙노라 전해달라 했단다. 정말 나이스 가이가 아닌가. 열심히 했더라면 표창장도 받았을지 모를 일이다.

  일층 복도 끝 햇살이 제대로 들지 않은 탓인 듯 아직 오후임이 무색하게 교실 안은 생기 없이 어둑어둑했다. 창밖으로 삼삼오오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같은 이유로 그 자리에 와 있을 동급생과 내가 마주한 문예반 선생님은 낡은 메탈 안경을 낀 까맣고 마른 남자였다. 아니 까맣게 말라 있었다. 수명을 다한 듯 흐릿한 형광등 불빛이 한몫 거들었더라도 내가 아는 소설이나 시와는 적잖이 거리가 있어 보이는 외모였다. 겨우 열한 살 소녀였던 나에게 문학이란 얼핏 아름다운 것인 듯했고 비록 슬플지언정 아름다운 슬픔 (대체 그런 게 있기나 한 건지 지금도 모르겠다) 이어야 했던 것 같다. 문학을 하는 사람, 시와 소설을 쓰는 사람 역시 궁핍한 시절을 절로 떠올리게 하는 초라한 모습의 반대편 어떤 형상이어야 할 것 같았다. 암울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 문학인이자 지성인의 얼굴이 어쩌면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건 지금에야 든 생각이다. 주말이면 밤마다 미국영화에 심취해 미남 배우들처럼 잘생긴 남자들만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이미 눈이 높을 대로 높았던 나는 선생님의 시들한 외모에 실망하고 시종일관 냉소적인 언변이 낯설기만 할 뿐 그가 설명하는 문예반의 취지라든가 하는 것들이 분명 우리를 현혹하는 말이었을 텐데도 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는 건 여전히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 간절함에 쐐기를 박기라도 하듯 문예반의 문턱은 너희가 상상하는 만큼 만만한 게 아니란 걸 제대로 알기나 하고 각오해라.”로 마무리되었으니 두어 번의 만남 이후 문예반에는 뜻이 없다는 이유로 더 이상 찾지 않았다. 자의가 아닌 일은 그만두기가 쉬워 마음이 편하다.

 그 후로 글쓰기는 까맣게 잊고 살았다.그땐 왜 그렇게 집에 가고 싶었을까?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선생님의 좀처럼 알 수 없던 독설과 사는 게 녹록지 않아 미리 늙어버렸을 겉모습을 얼마간 감내했더라면 지금쯤 글 좀 쓰는 사람이 되었을까?

 이제 나는 한참 먼 길을 돌아 비슷한 듯 완벽히 다른 장소에 와 있다. 같은 자리에 늘 처음처럼 서로 다른 굴곡을 간직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야기를 주고받음에 주저할 이유가 전혀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이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제 서너 달 남짓인데 다른 이의 글을 읽으면서 혹은 나의 이야기를 쓰면서 벌써 몇 번을 울고 웃는지 모르겠다. 그것만으로도 일상이 풍요로우니 이만하면 호사라 해도 되겠다.그러나 부디 울고 웃는, 웃고 우는 글이 한 번만이라도 나의 글일 수 있다면 더할 수 없는 영광이겠다. 대수롭지 않았던 빛바랜 기억 한편이 호사가 되고, 혹여 운이 따라준다면 훗날 한 번은 꼭 누려 보고픈 영광이 된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완숙   23-12-13 15:34
    
제인아샘
시작입니다.
어떤 일들이.말들이
글들이  새로 다가올까요.
성실한그모습 처럼  샘솟는 문운이기를
기원합니다
노정애   23-12-13 16:24
    
너무 멋진 시작을 알리는 제인아 선생님
환영합니다.
드디어 첫 글을 올리셨군요.
월요반에서
이 글 낼 때부터 비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의 생각들을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고 편안하게 잘 쓰셔서 깜짝 놀랐답니다.
이대로라면 곧 영광의 그 날이 오리라 생각됩니다.
이제 열심히 쓰실 일만 남았습니다.
활기 넘치는 글 잘 읽었습니다.
박정옥   23-12-13 16:50
    
덕분에 오랫만에 여기 댓글을 달아봅니다.
손가락이 놀랐는지 오타도 막 생기고...
김은미   23-12-13 23:56
    
제인아샘의 첫 글 제목 처럼 멋진 시작을 잘 하셨어요^^
세련미 넘친 글을 여기서 보니 더욱 수려한 느낌이 들어요.
영광의 그날이 바로 앞에 와 있는듯하군요.
사이다맛을 주는 시원한 글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문경자   23-12-14 23:44
    
제인아샘  올린글 잘읽었어요.
지나간 일들을 그림처럼 그려 놓았네요.
어릴 때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이곳에서 글을 대하니 벌써 행운이 오는 듯 합니다.
쓰면 쓸수록 더 좋은 글들이 많아 질거예요.
다음 글이 기대 됩니다.
김옥희   23-12-15 13:26
    
제인아샘 ~
글을 읽으며 '무의식'이란 말보다 '무심한 기억'이란 말이 얼마나 문학적이고 멋진 말인지 .
시작이 참 좋을 것이란 예감도 더불어 들면서, 나도 무심한 기억이 나를 찾아올 것같아 설레인답니다.
좋은 시작을 응원합니다!
장은경   23-12-16 10:53
    
어릴적 제인아선생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네요
반짝이는 눈망울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소녀
클릭 한 번! 참 잘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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