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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벼락 김치    
글쓴이 : 이필자    24-01-26 17:27    조회 : 1,013
   담벼락 김치..hwp (29.5K) [0] DATE : 2024-01-26 17:27:08

담벼락 김치

 올해는 얼떨결에 김장 김치를 담게 되었다. 몇 년 전에 절인 해남 배추로 담고는 맛이 없어 포기하고 있었다. 얼마 전, 지인이 강원도 절인 배추 주문하는데 같이 하자고 한다. 아직도 배추 탓을 하면서 이젠 김장 안 하겠다고 하고는 별생각 없이 그러자고 했다.

 그때 내가 담은 해남 배추는 통이 크고 배추 고갱이도 너무 두툼해서 아삭한 감이 좀 덜했다. 강원도 배추는 배추통도 작으면서 적당한 속살에 감칠맛이 나고 식감이 좋다.

 재주 없는 사람이 연장 탓한다더니 어설픈 내가 그 짝이다. 따뜻한 지방의 해남 배추는 별난 날씨만 아니면, 밭에 그대로 보관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강원도 배추는 날씨로 인해 일찌감치 작업이 끝난다. 절인 배추 택배는 내 맘대로 하는 게 아니고, 생산자 작업 일정에 맞춰야 한다. 하필이면 기말고사 기간이라 돌이킬 수도 없고 최대한 간단하게 하기로 했다.

 

 김장하기 하루 전날, 친구 젬마가 경주에서 식당 하는 동생 집에서 김장하고 오는 길이라면서 커다란 김치 통, 한 통을 준다. ‘아, 준다고 미리 말이나 하고 주지. 배추 주문도 하 지 않았을 텐데….’ 고맙다는 말보다 먼저 내 머리에서 나온 말이다. 참, 얌통머리 없는 생각 앞에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너른 경주 들판에서 잘 영근 고추의 고운 빛깔, 갖은양념으로 어우러진 김치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나는 감히 흉내도 못 내는 고수의 전통 김장 김치 그대로다.

 된장, 간장, 고추장은 자신 있지만, 김치 앞에선 늘 주눅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면서 김장하겠다고 일을 저질렀다.

 이런 내겐, 철없이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김치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있다.


 문경 고향 집엔 우리 집을 중심으로 골목을 끼고 또래 친구들이 열 명이 넘게 살았다. 우 리들은 그 좁은 골목을 휘저으며 밤낮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함께했다. 동지섣달 긴긴밤은 여나므살 우리에게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다.

 그날 저녁도 서둘러 된장국에 밥 말아 먹고 옆집 순희네 집으로 모인다. 살금살금 엄마 눈치 보며 부엌으로 들어간다. 나는 고구마 담당, 정희는 배추 뿌리, 영한이는 남은 밥을 가지고 오기로 했다. 다른 친구들도 집에 있는 간식을 가지고 오기로 했다. 엄마는 설거지해놓고 가라고 하는데, 아버진 아직 식사 중이다. 뒷골목엔 벌써 아이들 소리가 들린다.

“엄마! 내가 내일 점심, 저녁 설거지까지 다 할 테니까 오늘만 엄마가 좀 해줘요.”

다행히 엄마는 조심해서 놀다가 오라면서 얼른 가라고 한다.

 인식이 휘파람 소리에 일사불란하게 순희네 집으로 모두 모였다.

 하얀 분으로 유혹하는 감또개,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고, 더러더러 붙은 살이 더 달짝지근한 감 껍데기, 곶감, 홍시, 고구마, 모퉁이에서 몰래 나온 배추뿌리 등 들고 온 음식들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오늘은 무슨 놀이를 할지 고민한다. 깡통 차기, 숨바꼭질, 귀신 놀이 모두 자기가 제안한 놀이를 하자고 소리치고 시끌벅적하다. 결국은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윷놀이로 결정했다.

 정희가 집에 윷 가지러 간 사이에 남은 우리는 얼른 말판과 말을 만들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재주는 어디서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벽에 걸린 수영복 달력 얼른 찢어 반으로 접어 뒷면에 그림 잘 그리는 영희가 색연필로 그리고, 성냥개비 절반으로 똑딱 뿔개서 말판을 잘도 만들었다. 다시 가위, 바위, 보로 편을 가르고 본격적인 윷놀이에 들어갔다.

 도. 개. 걸. 윷. 모로 서로 이기겠다고,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벌써 배가 고파온다. 정희네 팀은 뒷 또에 구워서 같이 가고 아슬아슬하다. 삼세판 해서 진 팀은 김장 김치를 구해오기로 했다. 초장엔 계속 지더니, 막판에 인식이 세 번 모에 합쳐서 잡아서 우리가 이겼다. 진 팀은 김치 구할 집을 물색한다고 고민하고, 망만 보기로 한 이긴 팀은 맛있는 집 김치라야 한다고 빡빡 우겼다. 결국은 순희네 뒷집 인봉이 오빠 집을 선택했다. 그 집은 담장이 다른 집보다 더 높아서 좀 망설였지만, 김치가 맛있기로 소문난 집이다.

 

 누가 저 높은 담장을 무사히 넘을까 고민하다가, 다리 긴 정희가 넘기로 했다. 정지에서 박 바가지 하나와 검은 봉다리 하나를 들고 숨소리도 죽이면서 살살 걸어갔다.

 아무리 다리가 길어도 정희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높았다. 땅바닥에 엎드린 순희의 등을 밟고, 영한이는 정희 다리를 잡아 주고, 우리 셋은 양쪽 옆, 뒤에서 망을 보았다. 만약에 들키거나, 인기척이 나면 인식이가 휘파람을 불기로 했다. 정희는 남실거리다가 사붓사붓 걸어갔다. 남은 두 사람도 장독대 도착에 성공. 불 꺼진 방을 보면서 안도의 숨을 쉬었다.

 여섯 명이 먹을 거라 세 쪽을 들고 나왔다. 들킬까 봐 겁이 나서 단지 뚜껑 대충 덮고 부리나케 나왔다고 한다. 다시 힘겹게 담을 넘어 우리들의 자리로 돌아왔다.

 

 윷놀이의 흥분과 세 쪽의 김치로 인한 긴장감으로 배꼽시계는 요동을 친다. 각자 가지고 온 음식들에 맛난 김치까지, 우리에겐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김치가 세 쪽이라고 했는데, 두 쪽뿐이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허기와 흥분에 맛있는 음식 먹는데 정신이 팔렸다. 야밤에 신나게 먹고 떠들다가 기분 좋게 집으로 왔다.

 

 이튿날, 뒷집 작은엄마가 사촌 손잡고 우리 집에 오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홍식이는 나에게 눈을 찔끔거리는데, 왠지 싸한 분위기에 불안감이 앞섰다. 인봉오빠 엄마가 오늘 아침에 작은엄마 집에 찾아와서 담장에 김치 한 쪽이 걸쳐 있다고,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사촌 홍식이는 숙모의 닦달에 그만 이실직고 했다. 인봉엄마는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서 달라고 하면 준다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먹은 김치 맛은 살면서 아직 맛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시절 다른 것은 몰라도 김장 김치는 집집마다 넉넉하게 담았는데 남의 떡이 더 커 보여서 그랬는지, 소문난 맛 때문인지, 모여서 노는 자체가 좋아서였는지 왜 그랬는지 아직도 아리송하다.

 

 그 골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들은 사방에 흩어져 살면서 같은 추억을 간직한 채, 그 시절 인봉엄마 나이가 되었다. 한 번쯤 만나 다시 그곳에 가보고 싶다. 주름진 얼굴 마주 보면서 추억의 소리를 듣고, 동심의 흔적도 느끼면서 지난날을 되뇌어 보고 싶다.

 작은엄마, 엄마, 인봉엄마 아무도 없다. 지금은 사라진 우리 동네 뒷골목, 떠나간 사람들, 지난 추억은 참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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