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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민    
글쓴이 : 제인아    24-05-25 20:54    조회 : 2,165

                                                         고민

 

                                                                                                 제인아

 얼마 전 내 생일에 E가 녹차 케이크 쿠폰을 보냈다.

나는 취향이 아니니 다른 걸로 다시 보내라 했고 이틀 후 무난한 생크림 케이크가 도착했다. E는 그런 요구가 가능한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명이다. 요 몇 달째 다이어트와 건강상의 이유로 생일에도 케이크는 금기시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의 달콤함 때문인지 네 식구가 순식간에 해치웠다. 여유가 생긴 건지 성당에 다니며 좋은 말씀을 많이 들어서인지 무척이나 알뜰했던 친구가 요즘은 커피도 사고 케이크도 보내고 사뭇 달라졌다. 한동안은 알바도 열심히 하더니 일에도 돈에도 내외하는 듯하다.

 달라진 사람의 모습을 볼 때, 요모조모 뜯어봐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날 때, 마침 그 사람이 가톨릭 신자라고 말하면 그길로 성당으로 달려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도 마음만 좇아 선뜻 그럴 수 없었던 것은 서른 살 이후에 나에게 생긴, 너무 일찍 생겨버린 습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무엇을 하든 무언가를 시작하든 의사결정에 앞서 늘 선행되어야 하는 오랜 고민의 시간이 종교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여지없이 발현된 때문이랄까. 고민이 고민으로 끝나버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과적으로 좋을 때보다 그렇지 않았을 때가 더 많았고 삶의 다양한 측면들을 두루두루 경험해 보지 못해 아직도 여러 면에서 미숙하고 변별력이 부족한 나를 만날 때 느끼게 되는 아쉬움의 근원이기도 하다.

 더욱이 종교는 먹고, 입고, 즐기는 등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나의 이성이 말하는 종교란 일상이 넘볼 수 없는 심오함, 신성함을 가진 것이어야 했고, 내가 충분히 동의할 수 있을 만큼의 반드시 좋은 무엇이어야 했다. 선택의 폭이 넓은 것도 아니지만 한 번 선택한 이상 마음에 안 든다고 감히 갈아 치울 수 없는 무게감 또한 종교만이 가진 특권이라 여겼다. 종교에 대해 일관되게 문외한으로 살았던 내가 그 개념에 대해서는 꽤나 어렵고 다가가기 힘든 정도로 설정해 놓았던 셈이다. 그렇다면 조용하고 온화하며 자신의 종교에 대해 별말이 없는 사람들은 으레 성당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가톨릭을 선택했다는 것도 나의 착오이고 모순일 수 있겠다.

 상하이에서 두 번 미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 나의 호기심과 당연히 조용하고 온화한 친구가 이끄는 대로. 그곳에 가기까지 아마 몇 년이 걸린 것 같다.

 처음 간 자리에서 신부님은 소설가 박완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작가가 아들을 잃은 슬픔에 대해 쓴 책의 내용을 언급하며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인생에 느닷없이 찾아올 수도 있는 슬픔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공감이 가고 유쾌하게 말씀해 주셨다. 슬픔은 극복하기보다 그대로 바라보며 안고 가야 한다고 하셨다. 자녀가 없는 신부님이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좀 아이러니이긴 해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대목들이 대부분이어서 아, 그래서 신부님인가 보다 생각했다. 경험하지 않았는데 알 수 있고 타인을 공감시키고 이해시킬 수 있다는 건 다른 걸 다 떠나서 아주 많이 경청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게 맞다면,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도 신부님들은 사람들의 수많은 기쁨, 슬픔, 행복, 아픔, 고뇌, 불안, 질투, 욕망 등에 대해 들으셨으리라. 공감하셨으리라.

 누군가는 직접 경험해도 처음인 듯 같은 일을 반복하고, 누군가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불가능해 보이는 공식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뜻밖의 발견과 처음 가 본 자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또 어쩌면 신의 계시일지도 모른다는 의미를 부여해 가며 이변이 없는 한 쭉 다닐 수도 있겠다고 낙관했다. 나는 그와 같은 다소 작위적이지만 피할 수 없는 계기를 우연한 기회에 만나길 기다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번째 미사 후, 남편의 귀국 발령이라는 이변이 발생했고 가톨릭과의 인연을 우연으로 접어둔 채 5년 반이 지나고 있다.

 크리스천들은 대부분 활달하고 언변이 좋은 것 같고,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좀 철학적이라고 해야 할까? 내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람을 보고 종교를 규정할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내가 밤낮없는 독학으로 종교를 다 마스터할 수도 없는 일이며,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다 나처럼 종교를 놓고 이리 재고 저리 재지는 않을 텐데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종교를 선택하고 믿고 유지하게 되는 걸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걸까? 친구를 따라 연인을 따라 아니면 정말 우연히도 계시를 받은 걸까?

 나의 고민은 벌써 십수 년째 반복이고 늘 제자리걸음이며, 이제는 종교를 갖는 것도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이 되어 슬며시 꺼내 봤다.

 “성당에 다닐지도 몰라.”

 “엄마 제발.” 아이들은 종교를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생각하며 모태신앙을 예로 들며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종교의 자유, 선택의 자유를 처음부터 박탈한 부모의 월권행위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생각은 아직 자라는 중이며 나는 생각이 없는 것보다는 생각이 있는 편이 바람직할 때가 더 많다고 생각하는 부모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 유의 의미 있는 변화에 더 점수를 주고 싶은. 다만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에 종교도 예외는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가도 되는데 나한텐 강요하지 마.”

 남편은 내가 아는 한, 한 번도 종교를 고려해 본 적이 없고 그래서 나의 고민이 왜 고민거리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남편의 내면을 다 헤아려 볼 순 없지만 일반적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사람이다. 나는 남편의 심플한 사고방식이 우리가 소울메이트가 될 수 없는 분명한 이유라고 확신하다가도 남편까지 생각이 많아지면 그것도 참 피곤한 일이겠다.’ 했는데 실상 남편의 생각은 아예 반대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든다.

 언젠가 남편이 대체로 맑음.”이라며 평소 나의 기분이랄까 심리 상태를 말한 적이 있어 의아해했는데 회사 동료들, 그러니까 남자 동료들이 아내 기분에 따라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어서 스트레스가 된다고 했다며 나는 대체로 웃고 있으니 자기한테는 다행인 일이라며 좋아하던 기억이 떠오르니 말이다. 친구들이나 지인들도 내가 대체로 즐거워 보인다고 말하긴 한다. 내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나와 보여지는 내가 다를 수 있어서 그런 건지, 사실 나도 겪을 만큼 겪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수준이 그들의 그것에 못 미쳐서인진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때는 흐림보다는 맑음으로 보이는 편이 낫다고 나름 결론 내렸었다.

 또한 나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성당으로의 동행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 일단 좀 조용하고 싶고, 휴일에도 공식적인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갖고 싶은 마음을 그들은 왜 눈치채지 못하는 걸까? 사람은 누구나 혼자 있고 싶고 혼자 살고 싶은 순간이 있다는 걸 얼마나 더 온몸으로 말해야 알게 될까?

 E는 초등학교 때 동네 친구로 만나 다른 중학교를 돌아 다시 고등학교에서 만난 오래된 친구이다. 내가 곧 결혼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하자 부산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그녀가 몇 달 만에 남자를 만나 나보다 몇 달 먼저 결혼했다. 일반적인 절차를 밟았다면 E가 내 부케를 받았어야 했다. 성급한 결혼이어선지 결혼 후 한동안 힘들어하던 친구가 안산에서 서울로 그리고 인천에 살기까지 그 애가 힘든 만큼 나도 격변하는 내 생활에 정신이 없어 신경 써 주지 못했던 시간들이 있다. 고통을 호소하며 한동안 전화를 끊지 못하곤 했던 친구가 세월을 여럿 지나 이제는 조용하고 온화한 사람으로 변해가며 은근한 목소리로 가톨릭 입문을 권하고 있다.

  일주일에 네 번 이상은 성당에 가는 걸로 봐서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알겠다. 친구는 신부님이 멋있고 유머러스하고 말씀도 좋으니 그곳 성당에 한 번 다녀가라며 그래서 좋으면 계속 다니라고 했다. 문외한인 나도 사는 지역에 따라 성당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아는데 그게 가능하냐고 하니 예외도 있을 수 있다며 수녀님에게 물어본다고 했다. 내가 고민하고 있으니 그렇게라도 마음 써주고 싶었던 걸까?

 E가 변했다. 본래도 좋은 아이였지만 내가 예전에 보지 못했던 섬세함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안될 일을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생겼다. 친구의 변한 모습이 반갑고 좋으며 다소 편협할 수 있지만 무언가를 판단하고 선택함에 있어 사람을 우선순위에 둘 수밖에 없는 나의 기준이 얼마간 타당한 것도 같다. 다수의 표본이 말해 주고 있는 것도 같다. 수녀님의 대답은 원칙대로 안 된다는 거였고 그렇게 또 한 번 나의 가톨릭 입문이 미뤄지고 있다 하더라도.

 당장 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다.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까. 그런데 시간은 가기만 하고 나는 점점 내가 정말 종교가 필요한 사람인지조차 몰라 더 혼란스러워진다. 원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 그랬다면 아이 수능을 위해 기꺼이 달려가 백일기도라도 했을 것이다. 또 마음이 외롭고 고통스러워서라면 이미 백 번은 가지 않았을까.

 다만 가끔이라도 느끼기 싫은 마음의 불편함을 만날 때, 그 불편한 마음과 만나고 싶지 않은 소망이 내가 성당에 가는 것으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또 그곳에 가게 되면 만나게 될지 모를 작은 고민과 갈등이 현재의 내 삶보다 나을지 저울질하게 되고.

 나는 아마 5년쯤 후에도 다른 곳에서 그곳의 성당을 바라보며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냥 멋모를 때 아무나 따라 아무 데나 갔어야 했어.’

 겹겹이 때마다 숙제가 나를 따라다니고, 가장 도덕적이어야 함에도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통틀어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한 중심에 종교가 있었음을 때마다 상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리고 나는 가끔이지만 그 순간 나는, 나답지 않았어.’라고 생각될 때 마음이 제일 불편하다.

 


 

 

 

 


박정옥   24-05-29 18:56
    
아니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해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친구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과 같을거 같아요.
다음 글도 기대합니다.
노정애   24-06-09 09:51
    
제인아 선생님의 고민
저도 한때 했던 고민이라 더 공감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바꾸는 힘을 가진 종교
그 크고 위대한 힘 앞에 엎드리고 싶을 때가 많았지요
'그 순간 나는, 나 답지 않았어'
이 말이 어찌나 마음에 남던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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