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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들린 여자    
글쓴이 : 박해원    24-06-16 22:14    조회 : 776
   신들린 여자.hwp (178.5K) [0] DATE : 2024-06-16 22:19:05

신들린 여자

박해원

 

그녀와는 토지의 매도자와 매수자의 신분으로 만났다. 계약할 때부터 중도금을 건넬 때와 잔금을 치를 때까지 그녀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매도자에게 위임받은 공인중개사가 매매와 관련된 모든 절차를 대행했다.잔금을 치른 다음 날, 매도자라면서 문자가 왔다. 문제가 생겨서 잠깐 만나잔다. 무슨 문제냐고 물었다. 그녀는 만나서 이야기하겠다며 시간과 장소가 적힌 문자를 보내왔다. ‘115일 밤 9시 르네상스 호텔커피숍뭐 하는 여자일까. 궁금했다. 왜 하필 늦은 밤에 만나야 하는지도 궁금했다.매매계약서에 적혀있는 인적 사항을 보니 나와 동갑이었다. 그녀가 만나자는 장소로 10분 일찍 나갔다. 9시 정각, 들어오는 사람은 그녀 한 명 뿐이었으므로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생 머리 단발에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 캐시미어 코트가 한껏 멋스러워 보였다. 서로 상투적인 인사를 나누며 마주 앉았다. 매우 차분하고 세련된 그녀에게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이 계약을 파기 해야 할 것 같다고 입을 열었다. 순간적으로 정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왜요? 무슨 일이 생겼나요?” 나의 놀라는 모습에는 별 반응 없다는 것에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토지에 근저당 설정한 사람이 말소를 해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잔금은 다 줬는데 근저당을 말소해 줄 수 없다면 오히려 내가 서둘러서 계약취소를 해야 할 판이었다. 그녀는 번거롭게 해서 죄송하다며 위약금으로 일부 변상하겠단다. 왜 그러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리고 위약금은 안 줘도 된다는 말로 서둘러 대답했다. 결국 토지 매매계약은 취소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녀는 감사하다는 말투조차도 냉기가 느껴질 만큼 차가웠다. 뭔지 모를 음산한 기운에 사로잡혀서 나는 감히 그녀와 눈을 맞추는데 충실할 수 없었다.

차창밖엔 밤바람이 낙엽에 부딪히며 늦가을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밤공기를 옮기는 낙엽 소리와 어우러져 뇌리에서는 그녀의 모습들이 시끄럽게 아른거렸다. 차갑지만 품격이 느껴졌던 여자. 회색 신사 같은 그녀는 어떤 여자일까. 내가 왜,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 여자를 궁금해하고 있는 걸까. 밤이 깊을수록 겨울을 마중 나온 달빛은 하염없이 밝아 온다. 

평소보다 이른 아침 7시쯤에 그녀에게 혹시 일어났느냐고 문자를 보냈다. 놀랍게도 그녀는 어젯밤의 연속된 시간 속에 있었다.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는 답이 왔다. 노랫말처럼 온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밤에 일하는 여자일까? 글쓰는 작가일까? 아니면 화가일까. 더욱 궁금했다. 몇 시쯤 돈을 송금해 주실 수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오후 330분에 국민은행 송파 지점에서 만나자고 먼저 메시지를 보내왔다. 송금해 주면 될 텐데 또 만나자는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마치 선보러 가는 여자처럼 입고 갈 옷을 고민했다. 검은색 벨벳 투피스를 골라 입었다. 왼쪽 어깨 아래 다소 화려한 코사지도 달았다. 아마도 그녀에게 지지 않으려는 무의식의 경쟁심이었을까. 은행에서 업무를 끝내고 그녀는 고맙다면서 저녁밥을 사겠다고 했다. 나는 흔쾌히 응했다.

그녀는 재벌가의 넷째 며느리였다. 시아버지는 특별히 그녀를 아끼고 신뢰했다. 회사의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면 어김없이 그녀와 상의했다. 그만큼 그녀는 외모에서 풍기는 지적인 품격만큼 전문 지식을 겸비했고, 외국어(영어와 일본어)까지 유창했다. 시아버지의 해외 출장 때면 반드시 그녀가 동반했고 통역과 비서의 역할까지 모자람 없이 해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그녀의 시댁은 권력에 결박당한 채 비참하게 침몰했다. 밝은 태양처럼 찬란했던 기업이었다. 하지만 바뀐 현실은 작은 실바람에도 꺼질듯한 초라한 촛불에 불과 했다. 새로운 권력의 태풍을 감당하기엔 너무나 시간이 촉박했다. 그 충격으로 외마디 소리 한번 외치지 못한 채 시아버지는 식물인간이 되어 버렸고, 그렇게 3년을 버티다가 명을 달리했다.

재벌가의 재산들이 물거품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들들은 재벌 아버지가 지어놓은 바람 한 점 없는 온실 속에서 도깨비방망이를 가지고 사는 방법 외에는 어찌 살아야 하는지를 몰랐다. 저마다 아버지의 남은 재산 챙기기에 혈안이 되었고, 배다른 아들까지 나타나 자기 몫을 챙기겠다고 목숨을 걸고 투쟁하였다. 그녀의 남편도 적지 않은 재산을 상속받았다. 경험 없이 아무거나 사업에 손을 댄 남편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거의 다 탕진했다. 빈털터리가 된 남편은 알코올중독자로 삶을 연명하다가 5년을 채 못 견디고 아버지 곁으로 갔다. 그녀는 남편까지 보내고 시집 생활을 청산했다.

내일은 해가 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느 날 밤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슬픈 별빛을 따라 무작정 시댁을 떠났다고 했다.

시아버지가 별도로 챙겨준 금궤가 몇 개 있었지만, 해외로 유학 보낸 두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다 보니 그마저도 바닥이 났다. 그녀는 강한 자로 살아남아야 했다. 현실이라는 두려움이 그녀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재벌가의 며느리였다는 신분이 발목을 더 옭아매었을 것이고, 자존심이라는 철창 속에 갇혀 헤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우리 친구처럼 지내요.” 그녀는 대답 대신 자신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밤엔 잠이 오지 않아서 귀신들과 논다고 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라며 진지하게 말했다. 동화책에서나 나올법한 뜻밖의 말을 들은 나로서는 다음에 이어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섬뜩한 생각도 스쳤다. 말로만 듣던 귀신 들린 사람인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도 귀신이 있다는 것 인정해요.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사실은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었지만 그렇게 말해 버렸다. 그녀를 공감하고 있다는 것처럼 보여주고 싶었다. 아니, 어색한 침묵에서 벗어날 방법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날을 계기로 그녀와 친구가 되었다.

그녀의 삶은 여린 꽃잎에 소금을 뿌려놓은 것처럼 처참했다. 뼈와 가죽만 남을 만큼 피골이 상접 했다. 점점 어둠의 영에 사로잡혀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고, 담배와 술이 유일한 생명 연장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신께 자신의 생명 연장을 동냥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정말로 몸에 귀신이 붙어있는 사람처럼 간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모든 사람과의 교재를 끊고 땅속에서 겨울잠을 자는 뱀처럼 은둔생활을 하며 살았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활비를 어떻게 조달하는지도 궁금했다.

그녀는 아침 동이 틀 때쯤이면 잠자리에 든다. 밝은 낮이 싫고 햇빛이 싫다고 했다. 그리고 오후 6시쯤에 잠에서 깬다고 했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끼 식사를 그 시간에 소박하게 해결하고 어떤 날엔 일주일씩 씻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녀의 말대로 낮엔 자고 밤엔 귀신들과 논다는 말이 정말일까. 선입견일까? 가끔은 그녀의 눈빛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 때문일까. 난 그녀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고 싶다는 사명감이 가슴속에서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일부러 낮에 점심 먹자고 불러냈고, 백화점에도 갔다. 억지로 골프 약속을 잡기도 했고, 그녀와 잘 어울릴 만한 남자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내가 왜 그녀에게 유독 신경을 쓰고 있는 걸까? 비교적 그녀는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느 날 그녀가 내게 고백할 말이 있다고 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힘이 들어서 무속인을 찾아가서 상담받았다고 했다. 결국은 그 무속인에게 조상귀신을 영접하는 신내림을 받았다고 했다. 백작 부인처럼 품격 있는 그녀가 신내림을 받았다는 말에 나는 또 뭔가 대답할 말을 찾아야 했다.

그러니까 뭐랄까. 그러면 무당 되는 거 그런 거?” 나는 무당이 잘못됐다는 그것보다는 그녀가 무당이라는 말이 낯설고 생소해서 재차 확인하였다.

신내림을 받으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돈만 날리고 다 소용없었다고 말을 이어갔다. 정신과에도 가서 상담받아 봤지만, 사는 것이 더 무기력해진다고 했다. 차라리 죽고 싶다고도 했다. 정말 귀신이 들린 여자일까. 귀신 들린 여자가 본인 입으로 귀신 들렸다고 말한다는 것도 아이러니했다.

귀신을 쫓아내려면 교회를 다녀보기로 맘먹었어.” 의외였다. 그녀 입에서 스스로 교회라니.

, 원래 절에 다니지 않았니?” 어쨌거나, 좋은 현상이었다. 귀신은 모르겠고 교회를 다니면서 사람들과 교재하고 어울리다 보면 지금의 삶보다는 밝아지리라 생각됐다. 결코 그녀는 죽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패배자로 삶을 끝내고 싶지 않았던 거다. 삶을 사랑하고자 몸부림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녀는 알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면 죽는 것이 진리이듯이 삶의 소용돌이를 이겨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운명 이라는 것을. 더 늦기 전에 그녀의 삶이 밝아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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