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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비의 추억    
글쓴이 : 최정옥    24-06-16 23:12    조회 : 788
   여름비의 추억.hwp (77.5K) [0] DATE : 2024-06-16 23:12:24

여름비의 추억

 

최정옥

 

철벅 철벅, 신발 속에 빗물이 넘치고 발가락은 샤워 중인가 보다. 오히려 시원하고 개운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도 쏟아지는 여름비를 보며 근무를 준비할 때는 30년 전의 어느 날이 생각난다. 골프백을 메던 시절 이렇다 할 비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비가 많이 오면 골프백 뚜껑을 씌워서 근무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날도 골프백을 메고 근무하는데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졌다. 그럴 때 보통은 경기를 중단하지만, 우리 팀은 끝까지 라운딩했다. 골프를 잘 치는 남자 네 명이었다. 손님들은 골프 경기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시원하게 쏟아지던 비를 즐기는 것 같았다. 내 고객은 볼을 치고, 나는 그분의 골프백을 메고, 비 오는 잔디밭을 걸었다. 비옷이라고 해봤자 요즘 입는 일회용 비옷 정도 수준이었다. 온통 젖어버린 상태로 나도, 골프백도, 손님도 아껴야 할 것이 없었다. 조심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날 나는 내 손님이 좋았었나 보다. 철퍼덕거리며 걷는 잔디밭이 어찌나 시원하고 재미있던지.

 

요즘에는 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많아서인지, 고객에 대한 배려가 많아서인지, 비가 오면 골프카트에 튼튼하고 완벽한 포장을 한다. 수건을 여러 장 준비해서 골프채 그립이 젖지 않게 하고, 카트 좌석에도 방수커버를 씌운다. 캐디는 더욱 번거롭고 바빠진다.

대부분의 캐디는 비 오는 날 근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빗속에 라운딩을 고집하는 분들이 힘든 타입일 경우가 많고, 근무 자체가 번거롭고 더 고생스럽다. 자칫 감기 등 아플 수도 있다. 그래서 근무를 다음으로 미루고 싶어 한다. 나는 그때의 기억이 30년 지난 지금도 좋았던 추억이 되어, 여름비를 맞으며 근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골프를 즐길 때도 여름에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즐기는 우중 골프가 더욱 신이 난다.

 

비 오는 날의 근무를 두려워하지 않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비가 매일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날씨는 비가 오지 않지만, 어쩌다 오는 비라서 대비할 수 있었고 즐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쏟아지는 여름비는 무더위로 달궈진 세상을 식혀주고, 바짝 마른 잔디의 갈증을 해소해 준다. 뿌연 먼지를 씻어내는 청소비이며, 소중한 생명수이다.

가을에 오는 비는 두렵다. 가을비가 오면 무방비로 근무에 나가지 않고 철저히 보온을 준비한다. 행여나 준비가 미흡한 날에 맞은 가을비는 건강한 내 몸도 흠집이 날 것만 같았다. 일명 가을비는 골병드는 비다.

살다 보면 일상은 맑은 날처럼 그저 평탄한 날들이었다. 어쩌다 보니 시어머니와 크게 다투기도 하고, 남편이 큰 병을 앓기도 하고, 별거를 하기도 했다. 이런 아픈 날들은 내 인생에 가을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건강했던 내가 대비하지 못한 채 차가운 가을비를 맞고 휘청거렸으며 골병이 들것 같은 고통이었다.

우리의 삶이 어찌 한결같이 평탄할 수만 있을까? 간혹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내 인생에 비가 오는구나, 잠시 쉬어가 본다. 평탄한 삶에서는 놓칠 수밖에 없었던 나를 돌아보고, 일과 가족에 대한 집착을 잠시 내려놓는다. 평소에 없었던 고독과 외로움과 박탈감을 체험한다. 아픈 상처와 경험은 나를 힘들게 하고 주저앉게도 하지만, 또 다른 삶을 경험하게 한다. 미처 몰랐던 삶의 이면을 깨닫게 하면서 나를 바짝 긴장시킨다.

차가운 가을비 같은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온전히 외로웠고 고독했으며 아팠다. 버거웠다. 하지만 그 아픔마저 내 삶이고 소중했다. 시원하게 쏟아지던 여름비가 그치면, 세상이 깨끗해지고 시들했던 잔디가 생기를 되찾듯, 아픈 상처와 경험을 견뎌낸 나는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굴곡 없이 평탄하기만 했더라면, 미처 경험하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했을 내 삶의 이면이었다. 시원한 여름비와 차가운 가을비가, 지금과 내일의 나를 완성해 간다는 생각이 든다.

시원하게 한바탕 여름비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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