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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나는?    
글쓴이 : 윤소민    24-07-18 14:23    조회 : 2,737

근데, 나는?

 무역센터반 윤소민 

평년보다 더위가 일찍 찾아온 어느 금요일 저녁, 아들과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빠와 딸이 전쟁을 했다. 나가 있는 동안에 딸이 보낸 분노의 카톡이 왔지만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고 했는데, 막상 집에 오니 딸은 나를 거부하고 문을 잠가 버렸다.

'...내일이 딸 생일 파티인데 좀 참아주지...자라섬과 빛두리 식당 가기로 했는데...진짜 나들이 가고 싶은데 이 사람들이 파토를 내나!'

모처럼의 주말 나들이를 못 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말을 꺼내자마자 남편은 인상을 무섭게 일그러뜨리며 버릇없는 딸을 혼내야 한다고,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딸이 잘못했다고 더 이상 말도 못 붙이게 했다. ‘그래, 나도 남편과 한 편이 되어 교육은 해야지.’ 하지만 남편이 자초지종을 설명할 만도 한데 별 내용 없는 듯이 입을 다무는 것으로 보아 자기 잘못이 꽤 큰 상황인 듯한 직감이 왔다.

예상했던 대로 토요일 나들이는 취소되었다. 어차피 비도 오니 많이 억울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하루 지나 좀 나아졌는지 딸이 문을 열고 대화에 응했다. 발단은 아빠가 저녁을 차려주었고, 자기가 피곤해서 먹은 그릇을 싱크대에 담그지 않은,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되었다. 딸은 아빠가 좋은 말로 해도 되는데 화내면서 담그라고 한 말투와 언성에 화가 났고, 아빠는 나중에 담그겠다는 딸의 생각과 버릇없는 말투에 화가 나 고성이 오갔단다.

나를 달래려고 하지 마세요. 이제 저 아빠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요. 엄마한테는 미안하지만 화해하고 싶지 않아요. 아빠는 아직도 나를 생각 없는 어린애로 보고 무조건 소리를 질러요. 내가 깁스하고 걸어 다녀서 얼마나 피곤한데...그건 왜 생각을 못해요?”

서러워 울다가 울 가치도 없다는 듯이 울음을 참는 딸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그러니 누가 깁스하고 그렇게 친구 만나고 강남역을 돌아다니라고 했나, 잠깐 나와서 먹은 그릇 싱크대에 담글 힘은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속으로 들었다. 하지만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럴 때는 무조건 안아줘야 한다.

'딸바보'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보수적인 남편은 그런 용어를 외계어 취급하고, 도무지 다정함이 없다. 둘은 좋아하는 것이 분명한데 관계는 서먹하다. 이게 아빠의 성향 탓인지, 딸의 애교 없는 성격 탓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보수적인 남편이 딸에게 어떻게 했을지 안 봐도 비디오처럼 내 머릿속에 펼쳐졌다.

한참을 생각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고 상황을 되짚어 봐도 답이 없다. 남편은 애들이 자아가 세워져 가는 사춘기엔 당연히 자기 주장이 강해지는데 그것도 가부장적인 말을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우리 아버지한테 무서워서 앞에서 말도 잘 못했다."

퍽이나 자랑이다. 얼마나 설명했는지 모른다. 애들이 정상적인 발달을 하고 있다고, 이제 그런 시대 아니라고, 아니 이건 시대를 막론하고도 건강한 관계가 아니라고...

이제 반백살을 훌쩍 넘긴 남편을 보며 다 포기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혼 때 남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에 친정 아버지가 말했다.

"남편은 이해하는 게 아니라 외우는 거다."

이제 진짜 다 내려놓고 받아들이고 그냥 외워야하는 그 때가 온 것 같다.

딸에게 말했다.

엄마, 아빠는 이제 나이가 들수록 더 너를 답답하게 할 수 있고, 실망시키고 화나게 할 수 있다고. 최재천 교수가 그랬나? 인간에게 보수는 관성이라 시간이 흐르는 대로 그냥 두면 성찰도 하지 않고, 새로운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하던 대로 살려고 하면서 늙어간다고. 각고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노화라고...

그걸 보는 너는 우리 부모님이 안 그랬는데 갈수록 왜 저러나' 싶겠지. 우리도 안 그러려고 노력하겠지만 너의 비판력과 성장하는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할 거야. 그래서 참 미안한 말이지만, 부모를 이해해 달라고 했다.

문득 아버지와 엄마의 노화를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평가했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치매 부모님이 아무도 못 알아보는데 자신의 아들, 딸만 알아보더라는 지인의 말도 생각났다. 늙어가면서 네 맘에 안 들 일이 많겠지만, 그래도 네가 상상도 못 할 만큼 사랑했던 부모니까 이해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다 건강하고, 아직은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즐거운 일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이 때를 소중히 여기고 즐기자고 했다. 싸우지 말고.

딸은 아빠에 대해서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 그러자.

마침 종일 내리던 비도 그쳤길래 나가서 좋아하는 버블티를 사서 갖다 바쳤더니 표정이 좀 나아졌다. 사고는 누가 치고 수습은 내가 하는구나...

남편은 자기는 왜 버블티 안 사주냐며, 왜 위로 안 해주냐고 한다.

당신은 다음 주말에 부산 어머님께 가서 위로받고 오든가...근데,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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