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탓? 내 탓?
윤소민(2024.07.31.)
애들을 다 키우고 중년이 되면 나는 더 이상 세상일로 숨차게 달리지 않고, 마음은 흐르는 강물처럼 평온하며 감사가 가득할 줄 알았다. 하지만 웬일인지 나는 자꾸만 또 다른 도전을 시도했고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으며, 도전의 마디마디에 ‘재심사’, ‘불합격’이라는 결과지를 받아야 했다. 얼마 전 나는 또 도전했던 임용에 낙방했다. 멍하니 천정을 보고 누워 부모님을 떠올렸다.
이제 와 어른이 되고 보니 그렇게 선을 긋고 제한할 만큼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던데, 왜 부모님은 우리 5남매에게 국립대만 보내주겠다고 했을까? 왜 큰 도시로 가서 대학을 다니고 싶어 하는 나를 집 앞 교대에 주저앉혔나? 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도록 부담을 주었나?
“정말 그게 최선이셨나요? 그때 설정했던 한계 때문에 이 학벌 사회에서 내가 더 점프를 못하고 이렇게 발목 잡히고 있는 거 아시나요? 당신은 그 옛날 서울에서 대학 다니면서 부모 혜택을 누렸으면서 왜 우리는 안 된다고 했나요?”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남 탓하기가 좋다. 그 중에서 부모 탓이 가장 그럴싸하고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정말 원인이 거기에 있었을까?
중학교 시절, 독서실을 달로 끊어 책과 물건을 두고 자기 공부방처럼 자유롭게 사용하는 친구가 너무 부러웠다. 나도 그 애들처럼 하고 싶다고, 그러면 공부가 더 잘 될 것 같다고 했을 때 엄마는 곤란하거나 싫다는 내색 없이 지정석을 끊어줬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니 중학교 공부의 몇 배나 됨직한 방대한 공부의 양과 깊이에 기가 눌렸다. 선행을 하고 올라온 몇몇 친구들을 보면서 마음이 조급해졌고 자신감이 떨어졌다. 그래서 부모님께 ‘수학의 정석’과 ‘성문 종합 영어’는 혼자서는 벅차니 학원 가야겠다고 했다. 두 분은 고맙게도 혼자 할 수 있겠다고 할 때까지 보내주셨다.
대학 4학년을 앞둔 겨울방학, 임용고시 준비를 시작할 무렵에 당시의 임용 일타 강사 구평회가 전국을 순회하며 강의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내가 살고 있는 마산에는 오지 않고 서울, 대구, 부산까지만 찍고 올라가는 일정이었다. 나는 그 강의를 듣지 못하면 임용에 떨어지기라도 할 듯이 다급해져서, 엄마에게 강의를 들을 수 있게 부산에 숙박할 곳을 구해 달라고 요청했다. 엄마는 나로서는 한 번도 뵌 적이 없던 고모할머니 댁에 나를 맡겼고, 나는 그 덕에 할머니의 숙식 제공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시외버스를 타고 집과 학원을 왕복했던 생활에 비하면 정말 좋은 여건에서 공부했다.
그 때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내게 필요한 것을 알아차리고 원하는 것을 요구할 줄 알았다. 게다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누군가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억지로 하는 성격도 아니다. 그런 내가 했던 결정은 다 내가 한 선택이 분명하다. 더구나 부모님은 막내딸이라 뭘 해도 기대 이상이라고(특별한 기대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기특해했고, 크게 말리지 않았다.
미루어 보건대...비록 국립대만 보내주겠다고 선언을 하고, 교대가 다 똑같으니 기왕이면 장학금을 보장받는 곳으로 낮추어 가라고 했어도, 내가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설득했다면
“그래, 정 그렇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대신 잘 해야 된다이!”
하면서 허락했을 분들이다. 자식이 다섯 명이나 되니 때마다 필요한 자원을 알아서 찾아주고 먼저 권해주지는 못했어도, 내가 하겠다고 하는 걸 안된다고 막은 적은 없었으니까.
내가 선택했다. 두 살 터울인 자매들, 내 다음에 입학할 부모님의 소중한 아들까지 하면 대학생이 몇 명이냐 싶었다. 그런 집안 사정을 생각해서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은 효심으로 내가 선택했다. 괜히 입학 때부터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지 않았다가 계속 못 받게 되면 어쩌나, 내가 불안하고 자신이 없어 원서를 낮추어 썼다. 그래 놓고 이제 와 학벌 때문에 밀리는 상황인가 싶으면 '1점도 아깝지 않게 보내줬어야지.' 하면서 부모님 탓을 한다.
도서 <유쾌하게 나이드는 법 58>에서는 ‘서른이 넘었으면 자기 인생을 부모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한다. 심지어 그 나이를 스물다섯으로 낮추라고 한다. 이렇게 부모 탓하는 마음을 오늘로 그만하면 좋겠다. 스물다섯이 아니라 오십을 바라보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생각을 곱씹고 있으려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