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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반    
글쓴이 : 김선희    24-08-17 18:50    조회 : 4,019
   지반.hwp (16.0K) [1] DATE : 2024-08-17 18:50:28

                                                         지반

                                                                                               김선희

 

 

작은 스피커 안에 갇힌 목소리가 KTX 객실 안에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폭우로 인해 지반이 약해진 곳을 서행하고 있다는 안내 방송이었다. 지반이 약하다는 게 무얼 의미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일까, 나는 승무원의 목소리가 스피커 속으로 사라져 버릴 때 까지 머금었다. 창밖을 보니 잦아든 비가 하얗게 뿌려지고 있었다. 요 며칠 원 없이 쏟아 붓더니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듯 새침하고 얄밉게 내려앉고 있었다. 같은 내용의 안내 방송이 한 번 더 스피커를 탔다. 내게 왜 지반의 의미가 남다른 건지, 그제야 지리멸렬한 기억들이 갈피를 잡고 선연하게 떠올랐다.

폭우가 억세던 어느 밤, 부스스 눈을 떴다. 사위는 어둑하고 짙은 하늘은 얼굴에 쏟아질 듯했다. 오싹한 한기에 무릎을 끌어안으며 이불을 당겨 덮었다. 흥건하고 무거웠다. 몸에 닿자마자 몸서리가 쳐졌다.

오메 이걸 어쩐다냐. 바닥이 꺼져 부렸다.”

다급한 할머니의 목소리에 정신이 차려보니 빗물에 세간살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국민학교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비를 이기지도 못하는 판잣집에 살았다. 안 그래도 초라함이 뚝뚝 흐르던 집은 폭우가 내린 후에 흉물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지반이 약한 탓에 구들장이 꺼지고, 집채는 기울고, 거기다가 지붕까지 내려앉은 모습이란. 누구에게도 집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학교가 끝나면 빠른 걸음으로 허둥대거나 잔망스러운 거짓말로 친구들을 따돌리고 혼자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숨기려고 무진 애를 썼건만, 돌연 담임 선생님의 제안에 가슴이 덜컹거렸다.

 

숙제검사를 하던 그녀는 내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이번 주는 너희 집에 가서 밥을 먹어야 갰다며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는 똘똘한 친구들만을 골라 그들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화끈거리는 낯빛을 숨기려 고개를 떨어뜨린 채 그녀와 나는 집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 심장이 조여들었다. 멀리서도 황토색 판자로 헐하게 지은 조그만 판잣집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집에 가까워지자 할머니와 엄마가 밖에 쪼그리고 앉아 배추를 다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식칼로 배춧잎을 썰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가면을 쓴 사람들처럼 표정이 멈춰 있다가 내 옆에 서 있는 그녀를 보자 그제서 얼굴이 움찔거렸다. 선생님이라는 소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용수철인형처럼 튀어 오른 엄마와 할머니. 그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살뜰한 말투로 그녀를 맞이했다. 밥을 먹으러 왔다는 말에 찬장을 헤집어 단출한 상을 내온 엄마는 찬이 없어서 죄송하단 말을 몇 번씩이나 해댔다. 밥상머리에서 할머니와 엄마, 그녀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여러 번 입가를 올려 웃어 보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덕분에 창피함만 꽉 차 있던 내 마음도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일주일 내내 그녀와 함께 점심을 먹고 나면 특별한 사이가 될 것 같아 설레기까지 했다.

 

엄마는 내일 무슨 반찬을 대접할까를 걱정하느라 골똘해졌다. 그러나 엄마의 마음 씀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다음날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수업을 마친 후에도 집에 가잔 말이 없는 무정한 그녀 주위에서 쭈뼛거리던 나는 하는 수 없이 혼자 교실을 나왔다. 그녀가 더 이상 우리 집을 찾지 않는 이유를 곱씹어 보니 적잖은 탄식이 흘렀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이 싫었던 게 분명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가 아니고서는 이번 주 내내 오기로 해놓고 하루 만에 마음이 변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입이 댓 발 나온 채로 걷고 있는데 저만치 부반장 명희의 손을 잡고 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뒷모습이 아련해질 때 까지 쏘아 보았다. 맨바닥을 발로 걷어찼다. 흙먼지가 코에 부딪혀 아릿했다. 등 뒤에서 친구들의 말소리, 발소리가 뒤엉켜 들렸다. 호흡을 골랐다. 애꿎은 신주머니를 발로 차면서, 운동화 앞코가 시커메지도록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걸었다. 판잣집이 보일 때까지 걸음을 재촉하며 허둥대지도, 친구들을 따돌리려 하지도 않았다. 그날따라 집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이 더 이상 우리 집을 찾지 않았던 이유는, 사려 깊은 배려 일 수도 있다. 비록 점심 한 끼였지만 없는 형편에 본인이 부담 될 까봐. 하지만 내게 있어 부잣집 기와집만큼이나 단단했던 그녀의 존재는 그 일을 계기로 속절없이, 허망하게 꺼지고 말았다. 비는 내리지도 않았는데, 집을 받칠 힘이 없던 그것처럼, 내 어린 가슴팍의 지반도 꽤나 약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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