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면허(?)
“아니, 선생님도 부모 교육 신청했어요? 애들이 대학생이잖아요?”
우리 아이들이 다 컸다고, 대학만 보내고 나면 무슨 걱정이 있겠냐며 부러워하던 동료가 ‘부모 면허’ 특강을 들으러 온 나를 보고 놀라며 물었다.
“보수교육 받을 때가 됐죠. 애가 성인이 되면 또 다르게 필요한 부분이 있더라구요.”
나는 웃으며 일부러 그분과는 좀 떨어진, 두 자리가 나란히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내 옆자리는 아버지가 앉을 자리이다. 오늘은 아버지와 같이 부모 교육을 받는다.
우리 아버지...
작년 이맘때, 추석 연휴 이틀 앞둔 어느 날, 파랑 물감에 물을 많이 타서 칠해 놓은 듯 옅은 가을 하늘 속으로 ‘풍덩’ 빠지듯이 사라지셨다. 깨끗하고 단정한 삼베옷을 입고 꼭 맞는 나무 침대 속에 누워있는 아버지는 ‘생의 마감이 그렇게 고통만은 아니다.’ 라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편안한 표정이었다. 서울에서 급히 달려온 나와 아직 인사를 안 했으니까...금방이라도 “소미 왔나?” 할 것 같았는데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육신이 불길 속에서 한 줌의 재로 바뀌는 시간. 나는 그 시간에 밥을 먹으러 화장터 건물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는 형부와 조카들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내 가족에게는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갈 생각 없어요.”
하며 아들이 내 손을 잡으니 마치 엄청난 효녀였던 양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재로 변한 아버지를 흰색 항아리에 넣고, 그 항아리를 다시 학교 사물함같이 생긴 좁은 장에 넣었다.
‘아버지는 갑갑한 거 싫어하는데...’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걱정했다.
아버지를 아주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아버지와의 기억도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걱정이 생겼다. 그래서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서 듬성듬성 흩어져 있는, 몇 안 되는 ‘아버지와 나’의 기억 조각들을 모았다.
내가 다른 자식들에 비해 배움이 늦었는지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늘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셨다. ‘언니들은 언제, 어떻게 젓가락질을 배웠을까?’ 배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다들 할 줄 알았고 나만 몰랐다. 아버지는 ‘X’ 모양으로 젓가락을 잡고도 잘 먹는 나에게 그 방법은 틀렸다고 했다. 젓가락의 모양이 11자가 되게 하고 중지를 그 사이에 넣어 검지와 중지 둘로 움직여야 한다는 설명과 함께 시범도 보였다. 마치 과외를 하듯이 가까이 앉아 적극적으로 가르치던 아버지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나는 한글을 늦게 깨쳤나 보다. 집에서 언니들에게 받아쓰기 연습시키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나만 연습시켰다. 바른생활 교과서를 소리 내어 읽게 한 후, 공책을 꺼내 불러주며 받아쓰기를 두 번 실시했다.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효과가 있어서 연습하고 간 날은 점수가 좋았다. 아버지 덕분에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중학생이 되자 초등학생 때 놀기만 해서인지 학업에 결손이 많았다. 얼마나 공부를 대충 했으면 나눗셈도 정확히 못 했을까? 늦은 밤,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언니에게 물어보려고 거실에서 기웃거리는데 모두 잠들었는지 조용하고 아버지만 깨어 계셨다. 혹시나 ‘한심하다’고 혀라도 차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아버지는 다른 말 없이
“가져와봐라”
하시고는 알려주셨다. 첫 시험 결과를 들고 온 날, 부족해 보이던 딸의 등수가 생각보다는 괜찮았는지 살짝 웃던 아버지의 얼굴...기억이 난다. 나는 아버지를 계속 웃게 하고 싶었다.
아버지와 나의 기억 중 가장 행복한 조각은 내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던 날이다. 고사장 바로 앞 도로는 차가 많을 거라며 학교 아랫길로 운전하셨다. 아버지는 책가방과 도시락 가방을 들고 내리는 나를 운전석에서 뒤돌아보며
"소미! 잘봐라이!"
하며 활짝 웃으셨다. 아버지가 나를 정확하게 바라보며 그렇게 밝게 웃은 적은 그날이 처음 같았다. 그 순간에 나는 수능을 잘 봐서 칭찬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결혼하던 날, 친정아버지가 덕담하는 순서에서 아버지는 정말 담담하게 훈계했다.
“이서방, 소미, 사랑은 만들어 가는 거다. 살다 보면 미운 날도 있고 도저히 못 살겠다 싶은 날도 온다. 그럴 때 이해하고, 참고, 그렇게 사는 기다. 알겠나?”
안 그러면 큰일 난다는 듯이 눈에 힘을 주는 아버지를 보며 ‘참 정도 없다. 섭섭한 척이라도 하지’ 하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결혼 후에는 직장 생활하며 내 가정을 꾸리기에 바빠서 아버지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다가 그와 마지막 독대를 한 날은 아들이 재수를 결정했던 겨울, 이듬해 설날이다. 원하던 대학의 ‘추가합격’에서 아들 앞의 번호까지 들어가고 마감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이 드라마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억울하고 슬픈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정말 친정을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의 설득에 못 이겨 억지로 갔다. 세배하고 세뱃돈이 오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일 때 아버지는 조용히 나를 방으로 불렀다.
"니가 너무 공부로 아를 잡으니까 아 표정이 저렇다이가. 공부! 공부! 하지 마라. 알겠나!"
입시 뒷바라지로 피폐해진 내 마음을 위로는커녕 혼을 내는 아버지가 어이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쩌면 저렇게 위로라는 걸 모를까? 내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니까 내가 안 온다고 했잖아!”
나는 애꿎은 남편을 탓했다. 그 일로 나는 아버지와 서먹해졌고 최소한의 예의만 갖출 뿐 같은 공간에 있는 상황도 가급적 피했다. 그때는 아버지가 나를 영원히 피해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아버지는 나에게는 따뜻한 애정보다 ‘지도와 훈계’의 기억만 남기고 떠나셨다. 아마도 가르치는 것이 ‘부모 역할’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분 같다. 그래서 오늘 나는 같이 부모 교육 받자고 아버지를 저 먼 곳에서 모시고 왔다.
아버지 세대에 ‘부모 교육’이라는 것이 없어서 그렇지, 아버지는 학습력이 좋으시고 교육열도 남다르니 잘 배우시리라. 이 교육을 받고 나면 아버지는 나한테 ‘다정한 기억’을 못 남겼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겠지? 그러면 나는 내 마음이 무너졌던 그해 설날 얘기를 하면서 오늘 배운 내용을 토대로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할 계획이다. 아마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겠지?
“우리 소미, 그동안 아들 대학 보낼라고 쌩 고생했는데 마이 실망했제? 그래, 그래, 다 괜찮을 끼다. 한 해 더 하는 거? 긴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이다.”
그러면 나는 그동안 아버지를 외면했던 잘못을 사과드리고
“아버지, 잘 가세요. 우리 다음에 좋은 곳에서 꼭 다시 만나요.”
하면서 한번 안고 보내드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