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홍 수 야
내가 어릴 적에 충청도 논산에서 어린 남자애가 우리 동네에 머슴살이를 왔다. 옆집 할아버지의 큰아들이 논산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소개로 남자애는 이곳 경상도 산골마을까지 왔던 것이다. 남자애 이름은 춘식이였으며 그의 어머니가 집을 나간 후 할머니와 살고 있었다고 했다. 머슴살이가 시작된 춘식이는 풀들이 무성해지는 여름이 오면 소를 몰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산으로 풀을 먹이러 갔다. 산등성이에 올라 간 아이들은 소들을 방목해 놓고, 나무그늘에 모여앉아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며, 해가 질 때까지 어울려 놀았다. 작고 예쁜 돌멩이를 골라서 공기놀이도 하고, 어떤 애들은 풀피리도 불면서 산등성이를 누비며 다녔다. 그런데 춘식이는 동네 아이들이 하는 놀이에 끼지 못하고, 멀뚱멀뚱 주위만 맴돌며 항상 기가 죽어 있어 처량하고 불쌍해보였다. 나는 춘식이의 등을 밀고 와서 우리가 하는 놀이에 같이 하자며 챙겨주었다.
어느 골짜기에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산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면 배부른 소들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지기도 했다, 이런 날엔 우리들의 머리 위를 나는 새들의 노래 소리마저 어우러져 산골마을의 여름은 가을을 향해 풍성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푸르게 펼쳐진 산들이 우리들과 소들에게는 맘껏 놀 수 있는 운동장이었다.
윗동네에는 예쁘고 마음씨 착한 숙자라는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산으로 소를 먹이러 가면, 동네의 여자동생들을 무릎에 눕혀 놓고, 귀지를 시원하게 파주기도 하고, 머리도 예쁘게 땋아주기도 하는 천사 같은 소녀였다. 우리는 그 언니의 무릎에 얼굴을 맡기고 스르르 잠드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귀나 머리를 만져주면 졸리게 되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인 것 같다. 그리고 예쁜 꽃을 꺾어서 머리에 꽂아주며 “아이 예쁘다.” 하며 고운 말만 하는 정 많은 소녀였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친언니보다 함께 한 추억이 더 많으며 본을 받고 싶은 우리 마을의 대표적인 언니다.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면 우리들은 우르르 소를 몰고 마을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이 집, 저 집 사랑방에 모여서 감자, 땅콩 등을 구워먹으며 주제 없는 이야기들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집 나간 춘식이 어머니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춘식이는 보따리를 꾸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어느덧 장성한 숙자는 봄이면 친구들과 들에 나가서 나물을 캐고, 집안일을 도우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강둑에 나가서 나물을 캐고 있는데, 듬직한 군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서 인사를 하며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닌가. 놀란 눈으로 자세히 보니 그 군인은 춘식이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나물바구니를 던져버리고 줄행랑을 쳤다. 도시와 달리, 이곳은 약 50 가구가 살고 있는 작은 산골마을이었으며, 소문도 빠르고,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방귀뀌면 똥 쌌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부풀려지고, 양반, 상놈을 따지는 동네였다. 이 모습을 사람들이 보고 소문이라도 내면, 마을에서 살지 못하게 쫓아내 버리는 풍습이 남아 있는 마을이다. 더구나 머슴과 평범한 집 처자의 아찔한 이 광경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후 숙자는 부산에서 결혼생활을 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친정에서 함께 자란 친구의동생 결혼소식을 듣고 대구예식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춘식이도 주인집 아들결혼식에 축하하러 논산에서 달려 왔던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머슴살이 할 때 고달픈 순간도 참 많았을 테고, 주인 아들 결혼식까지 참석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거기에서 두 사람의 어색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춘식이는 참한 여자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고 하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고 한다.
예식을 본 후에 두 사람은 “잘 가라” 하고 헤어졌다. 부산을 가기 위해서 숙자는 터미널까지 가는 택시를 잡으려고 왔다 갔다 하는데, 갑자기 춘식이가 그곳까지 태워주겠다고 하며 숙자 앞에 차를 세웠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함께 타게 되었는데. 터미널에 내려 주고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춘식이는 돌아왔다. 그는 손질되지 않은, 뿌리에 흙까지 주렁주렁 달린 꽃 뭉치를 갖고 와서 숙자에게 대뜸 안겨주었다. 부산 가는 버스가 떠나기 전에 예쁜 꽃을 꼭 사주고 싶었다고 하며, 꽃집에서 새벽시장가서 도매로 막 사온 꽃을 다듬지도 않은 채로 한 다발 사왔다고 그는 말했다. 숙자는 받지 않겠다고 한참 동안 실랑이하다가 받았는데, 흙 묻은 꽃송이 사이에 흰 봉투가 꽂혀있었다고 했다. 숙자는 술 마신 사람처럼 화끈거리며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꽃 사이에 끼워져 있는 봉투를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약 50만 원 정도 되는 현금이 담겨 있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아서 당장 그 봉투를 돌려주며 “내가 왜 너의 돈을 받아야 하나?” 하고 둘은 그렇게 헤어졌다. 숙자는 고속버스에 타기 전 그 흙투성이의 꽃 뭉치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부산으로 돌아갔다.
그 후 춘식이는 연락처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수시로 전화벨이 울리는 바람에 숙자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경이 발생했다. 고민 끝에 춘식이의 평소 유순한 성품을 보아 연락하고 지내도 별 일 없을 거라고 생각되어 전화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그들은 편한 친구처럼 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논할 일이 있으면 의견도 구하고, 손자들 자랑이 시작되면, 신이 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두 사람은 이번 생에서 결혼을 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친구로서는 아름답고 귀한 인연임은 확실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