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의 행복
김 화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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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온 아이가 어쩜 저리도 까맣고 바싹 말랐을까? 먼 필리핀에서 왔을까? 눈에 들어오는 저 아이는 유난히도 불쌍하고 안스러 워 보였었다. 놀이터 한쪽 귀퉁이에서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며놀고 있는지 한 7세정도 되어 보였다.
어느 해 가을 우리 아들이 5 살 적 이었다. 그날따라 우리 아이 손을 잡고 놀이터에 갔었는데 그 아이가 내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나도 애들을 키우는 엄마였기에 그 애가 유난히 안스러워 보여서 옆에 다가가서 살며시 물어보았다. “얘야 너는 집이 어디니?” 너는 누구랑 사니 물어 보았지만 아이는 힐끔 힐끔 바라만보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 아이가 놀이가 끝 날 때까지 기다려 보았었다. 도대체 어디에 살며 어떻게 사는지 혹시 몸에 병이라도 있는 아이인지 그 아이 부모가 있는지 모든 것이 궁금했었다 .
한참 후에야 아이는 모래가 잔뜩 묻은 손을 툭툭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자서 터덜터덜 천천히 힘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따라가 보았더니, 그 아이가 들어가는 집은 정말 초라하고 어수선했었다. 나는 그 아이와 그 집을 보고 너무 가슴이 아프고 초라해 보여서 그대로 돌아 올 수가 없어 몇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두드렸다. 아이가 달려와서 문을 열어주어서 들어가 보았더니, 손자와 할머니가 너무 불쌍하게 살고 있었다. 팔십대의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어디서 왔슈?“ 하고 물었다.
나는 “할머니, 저 아이와 놀다가 아이 따라왔어요.” 그러면서 나도 물어보았다. “할머니 누구랑 사 세요 ? 저 아이가 가여워서 따라왔어요.” 그랬더니 조금 후에서야 할머니는 말 문을열었다. “막내아들 손자요. 지랄하고 며느리 년이 바람이 나서 도망을 치고 나니 아들까지 정신이 이상해지더니 집을 나가 버려서 우리 불쌍한 손자랑 나만 둘이 남았다오. 저놈이 불쌍해 죽겠다오” 하시면서 할머니는 앉은뱅이처럼 앉아서 모든 일을 하신다며 저 애가 불쌍하다고 혀를 껄껄 차시고는 어쩔 줄 몰라 하시며 누가 좀 돌보아 줄 사람 좀 찾아달라고 나에게 부탁을 하셨다. 나는 너무나 불쌍한 아이와 할머니를 그냥 두고 올 수가 없어서 “그럼 할머니 저 아이를 며칠만 우리 집에 데리고 있을께요.” 하였더니, 얼른 할머니는 “그럴라우? 고맙수 젋은이..” 나는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그 아이를 데려왔었다.
아이를 우리 집에 데리고 왔더니, 우리 식구 모두들 저 애가 누구냐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며칠만 묵고 보내자고 하고나서, 저녁에 남편에게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그럼 우리가 키우자. 애 한명 더 있다고 해서 우리 집 형편이 기울겠느냐.”며 불쌍한 아이 부모 찾을 때까지만 돌보아주자고 했다. 나는 남편이 고마웠다. 사실 나도 그런 마음이였는데 나 혼자 결정 할 일이 아니라 며칠만 있자고 했던 차였다.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아마 남편도 그 아이가 불쌍했던 모양이다.
그 후 그 아이와 우리 아들은 형 동생하면서 너무 잘 놀았고, 아이가 붙임성이 있어서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 둥글둥글 예쁘게 자라났다. 물론 아이 때문에 속상한 일도 적지 않았다. 하루는 아이가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그냥 가져오는 일도 있었고 놀이터에서 다른 친구의 물건을 빼앗아 온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애와 아들을 앞에 앉혀놓고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며 훈계하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우는 아이를 보면, 나도 마치 내 아들인양 속상해서 함께 끌어안고 울곤 했었다. 그렇게 아이는 우리들과 함께 행복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때로는 할머니도 마음에 걸려서 가끔 아이와 나도 찾아 가보곤 했지만 할머니 까지 못 모시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 후 해가 바뀌고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다른 아이 못지않게 몸에 살도 통통하게 붙었다. 그 아이만보면 든든하고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아주 예쁘게 자라났다. 끼니때만 되면 얼마나 많이 먹는 지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을 정도였다. 오죽 하면 우리 친정어머니께서 ‘저 아이 배속에는 걸구가 들었다’고 말씀하셨을까.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 얘 많이 먹이세요. 아이가 무슨 죄가 있나요?” 라며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이는 행복 속에서 잘 자라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만 보면 행복하고 뿌듯했다. 왠지 큰일을 해 낸 것처럼 내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우리 집에 라면 2 박스를 들고 찾아와서, “저..저..저기요.. 제..제가... 아이 아빤데요.. 우리 아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면서 못 데리러 왔었어요..정말 죄..죄송해요..... 그리고 고...고마워요..” 하면서 그는 뒤늦게 새 색시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되었다는 자초지정과 함께, 떡 방앗간을 시작하려는데 시작하기 전에 제일 먼저 떡을 우리 집에 해주고 싶었노라며, 2 개의 라면박스 가득히 떡을 채워서 가져 온 것이였다.
말을 더듬더듬대면서 무언가 인사하고 싶은 것 같은데, 본인뜻대로 표현이 잘 되질 않아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그는 “순박” 그 자체였다. 그는 덧붙여 “조..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제..제가 자리 잡으면, 꼭 우리 아들 데리러 오겠습니다.” 라며 머리를 긁적이며 되돌아갔다.
그 순간 나는 하늘을 날아갈 듯한 행복함과 보람을 느꼈다. ‘내가 정말 옳은 일을 했구나.
나는 그 떡을 이웃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자랑을 했다. 그 아이 아버지가 왔었다고
동네 사람들 모두 정말 잘된 일이며 함께 자기일 인양 좋아들 했다.
그해 가을, 그 남자는 아이를 데려갔다. 우리 가족은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아이를 보내야만 했다. 3 년 동안 행복 속에서 잘 자라준 그 아이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그 후론 안타깝게도 소식을 듣지 못했지만, 새어머니 사랑 속에서 잘 자라고 있으리라 믿어본다. ‘태성아’ 지금은 고 3 쯤 되었겠지? 부디 건강하게 잘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란다. 남보란 듯이 멋있게 자라서 한 번 쯤은 이 아줌마에게 찾아와주렴.’ 가끔은 생각이 난 단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