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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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화 순
아버지는 술 한 잔 하시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여자는 객지에 나가면
남자 보길 원수 같이 보고 서울에는 모든 남자들이 도둑이고 간첩이라고 하시며
“먹는 것은 개돼지 같이 먹어도 잠자리만은 조심하고 꼭 가려서 자라고” 수없이 이르셨다
서울에 가면 두 눈뜨고 코 베어간다고 서울이 그렇게 무서운 곳 이라고.
어느 날인가, 내 나이 스무 살 되던 봄. 뒷동네 언니가 서울에 함께 가자기에 나는 따라서
무작정 올라와 백양 메리야스 회사에 취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아버지말씀을
생각하며 서울은 무서운 것이라는 것만 생각했다 .
어느 날 친구는 남자 친구가 군에 간다고 송별회를 한다기에 우리 몇 명은 킬킬 대면서 따라갔다. 그곳은 형님 집 조그마한 빌라였다. 남자 친구들도 몇 명 있었다.
그곳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하고 노는데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노래는 못한다고 일어나서 춤을 추겠다고 하였다. 남진의 님과함께 를 부르면서 개다리 춤을 신나게 추었다 내가 생각해도 우스웠다. 무슨 용기로 그리 추었는지.
그 후 지금의 남편은 나를 찍었다고 했다. 자기가 보기에 너무 화끈했다고.
친구들에게 내 이야기를 자주 묻자 친구들은 나를 놀려댔다. 누구와 누구는 좋아한다고
어느 날 나는 화가 나서 그 남자에게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그 남자는 양복을 입고 봉천동 다방으로 나왔다. 나는 화가 나서 싸우러 갔는데, 여름이라 청바지 입고 슬리퍼 신고
씩씩대며 다방으로 갔더니 그는 깔끔한 양복차림으로 나를 맞이했다. 나는 첫 마디에 화를 내면서 “말조심 하세요” 하며 친구들이 이상한 말을 해서 화가나서왔다며 막 퍼 부었다 .
그 남자는 무슨 소리냐고 오히려 화를 내면서 해명을 했다. 한참 후에야 우리는 서로 오해있었던 것을 풀고 이해하고 봉천동 고개 길을 조금 걸었다. 내가 보기엔 그 남자는 정말 못생기고 키도 작고 결혼할 상대는 정말 아니었다.
그는 봉천 고개를 걷는 동안에 나에게 물었다. 화순 씨는 결혼하면 어떻게 살 생각이냐고. 나는 무심코 한 말이“나는요, 이다음에 결혼하면
시골에서 소 키우고 돼지 키우면서 밥한 솥 해 놓고 오가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살 거예요”
그랬더니 그는 “꿈이 참 소박하네요.” 하면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우리 집 오남매 중 맏이고 우리 엄마는 십삼 년 전에 돌아가시고 우리 아버지는 삼 년 전에 돌아가시고 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생활하고 있고, 우리막내 2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엄마 가슴을 파고들어 젖 달라고 울었다 했다”
그 남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목이 메여 말을 한다. 결혼상대는 신중히 골라야 한다고.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놀라서 순간 어떻게 살아요? 하고 물으며 놀랐다. 그럼 고아.
그 후로 며칠이고 나는 그 남자가 불쌍하고 .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했다.
누가 그 집 남매를 함께 모여서 살게 할 수 있을까. 과연 누가 희생자가 되어줄까‘’
내 머리에는 오르지 그 남자가 불쌍하기만 했다. 순간 못생긴 생각은 어디로 사라지고
마냥 불쌍한 것만 생각이 났다 .
며칠 고민 끝에 나는 결심했다 . 내가 도와보자. 아버지 말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서울 온지 몇 개월 만에 나는 제 2의 인생의 결심을 했다 .
그해 가을에 우리 부모님께 연락을 했다.
아버지는 벽락같이 화를 내시며 사기꾼한테 걸렸다고 엄마만 들볶았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오로지 그가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니까.
그 후, 우리 아버지는 결혼을 반대하시며 엄마한테 볶았다고 했다 .
엄마는 ‘이걸 어쩌나.’ 하시며 눈물과 한숨으로 보냈다고 하셨다고했다.
어느 날 우린 고향에 인사를 간다고 고향을 찾았다. 우리 아버진 집에 들어오지도 말라고 펄쩍뛰기에 “아버지용서 해 주세요.” 애원을 했다.
아버지를 겨우 달래, 한쪽 방에서 그는 자고 다음날 서울로 올라왔다.
몇 달 후 또 고향에 가서. 그 때는 자기네 고향에 과수원 밭에 2000평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걱정 마시라고, 절대 고생 안 시킨다고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곤 했다 .
아버지는 그래도 마음이 안 놓였다. 부모 입장에는 너무 어린 딸이 불안한 모양이셨다.
그 다음해 봄 우리는 동거를 시작하면서 대림동에다 자그마한 방 하나에 부엌하나 달린 방에서 동생들을 하나 둘 함께 살았다.
시골 막내 남동생은 초등학교 6학년 이였는데 서울 문창초등학교 전학을 시켰고
막내 시누이는 백양메리야스에 취직을 하고 우리는 동거 하는 동안 한방에서 행복했다.
한 집에 산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놓이곤 했다.
우리는 그 해 가을에 결혼 날짜를 잡아서 고향에 통보를 했다.
그 후에 나는 고향에 내려가서 소 한 마리 팔아 달라고 아버지께 떼를 부렸다.
왜냐하면 우리 친정은 소를 몇 마리 키웠고, 여기는 너무 없어서 모든 것이 절실했다.
내가 며칠 있는 동안에 우리 아버지는 농암 장에 소두마리를 팔아서 돌아오셨다.
딸 성화에 못 이겨서인지 그날 밤 아버지는 술 한잔하시고 하소연을 하시면서 돈을 방바닥에 던지셨다. 나는 철없이 그 돈을 주워 그 다음날로 서울에 있는 남편에게 주었다 .
이 돈으로 앞으로 살아갈 대책을 찾으라고 그때 돈 일백 팔 십 만원. 큰 돈 이었다
그때는 생각하기에 친정은 그 돈 없어도 살고 여기는 한 푼이 아쉬웠다.
우리는 그 돈으로 낙찰 계돈을 넣어서 그 다음해에 화곡동에다 인테리어 가게를 차렸다
그 후 예쁜 두 딸도 낳고 열심히 살아서 남편은 건축 일을 시작하고 나는 인테리어 업에
열심하고 우리는 남들보다 빨리 성공하게 되었다 .그래서 92년 봄TV 아침마당에 [반대결혼성공사래] 원고에 당선하여 출연도 했었다
그러는 동안에 95년도에는 예쁜 우리아들도 태어났다 .
그 후 2002년도에 우리는 단독하나를 사서 우리 친정 부모님을 서울로 모셨다.
그것은 정말이지 큰 축복 이었다. 우리아버지 엄마와 한 지붕 아래서 산다는 것은
꿈같은 행복이었다. 평소에 우리 부모님께 미안한 것을 좀 보답할 기회가 온 것이다.
그래도 우리 친정 부모님은 행복한 울타리 속에서 서울생활을 8년 동안 해 보시고 생을 마감 하셨다.
그동안에 남편은 우리 부모님을 자신의 부모라고 생각하면서 부모님께 정말 잘해주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남편에게 정말 고맙다 . 남편 사업도 잘 풀리고.
우리 남편은 이 모든 것이 부모님께서 돕고 계신다. 믿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글을 쓰기 시작 했다.
남편이 열심히 앞만 보고 살아 온 이 길이, 지금의 성공길이라는 것을 삼십 여 년 동안 지켜본 내가 이 수필을 쓴다기보다는 남편이 있었기에 내가 이 자리에 있어 나의 자서전 그리고 아내의수필집이라는 제목으로 남편 회 갑 때 이 책을 내고 싶다.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