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모임에서 내 소개를 할 때에 나는 늘 곤경에 빠진다.
"Who am I? "
내 스스로 나에게 물어보아도 정답은 없고,
'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인가? 구체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이곳에 무엇하러 왔는가?
"내가 누구지?" ......
"몰러유~"
.................
사실,부끄럽게도 '홍 순규! 나는 누구인가?'대한 대답을 스스로 아직도 못찾고 있다. 정확히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1962년생.. 오학년이 넘은 나이임에도 나를 모르는 비보다.
공자님께서는 나이 50세이면 "知天命이라 했거늘...쯧쯧..."
나는 내 나이 40줄에 들어섰을 때에도, 그 "不惑" 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탐욕과 공포에 민감했었던 40대를 지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불혹이 아닌 미혹에도 탐을 구하는 나약성을 보일 때가 많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보면,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시간흐름에 내 몸을 날려 흘려보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서울에서 3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오류초등, 유한중, 우신고, 고려대, 일본 교토대, 미국 유씨 버클리.. 나의 학력 리스트, 소위 가방끈이다. 길다. 책을 많이 보았다. 살아있는 지식보다는 죽은 지식의 책장을 오랫동안 탐했다. .. 어린 시절은 만화가게 주인아저씨에게 나의 모든 용돈을 갖다 바친 만화광이었다. 스포츠 같은 동적인 생활보다는 만화책을 비롯한 책을 가까이 한 정적인 생활을 많이 한 것으로 회상된다.
스포츠는 수영, 등산, 테니스를 즐겼지만 최근에는 그저 걷기 운동으로 모든 스포츠 생활을 대신하고 있다.
사회생활은 국방과학연구소 부설 품질검사소 창원분소,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원, 삼성전자 기획법무 지적재산센터에서 일했다. 삼성전자 법무팀에서 일하다 일본지역전문가 과정으로 발탁(?)되어 1992년 8월 도일, 일본과 일본인을 연구하면서 삶의 모양새를 바꾸었다.
한국을 떠나니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매일 마시는 맑은 산소의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있었 듯이, 한국에서 살 때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 했었다. 외국에 오래 살게되면 애국자가 된다라고 하더니 정말 그렇게 된 것 같다. 한국인 홍 순규라는 것을 또렷이 자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귀중한 나 자신의 근본이라는 것을 알았다.
김치를 최고로 좋아하는 내가 어떻게 만 5년이 넘는 외국유학생활을 보냈는지 신기롭다. 단 하루도 먹지 못하면 밥 맛이 없을 정도인데 말이다. 아마도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었기에 견디어 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각하니 서양의 클라식음악 보다도 우리나라 국악이 더 좋아졌다. 소위 7080시대의 가요에 심금이 울린다. 송창식의 노랫말에 마음을 실어 흥얼 거리면서, 생각없이 읊었던 젊은 시절보다는 조금은 자아의식이 높아졌나 싶기도 하다.
서양의 추상화를 보는 것보다도 동양화의 풍경화를 볼 때 마음의 평안을 얻고, 아름다움의 감칠 맛을 더 느끼는 것이 이제는 당연하다.
최근에 내 영혼의 본류를 찾게 도와주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잠자고 있던 나의 의식을 깨우쳐 주시는 분들과의 조우에서 나는 하느님께 감사기도 드리고 있다.
[이 게시물은 사이버문학부님에 의해 2013-01-11 09:25:45 가입인사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