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할 수 없는 큰 감동의 파도가 밀려와 나를 덮쳤다. 슬픔 가득한 선생님의 음성에 나는 그만 감전되어 버렸다. 여리고 순진한 나는 선생님의 가슴에 또 다른 ‘아나벨리’로 부활되기로 자청하기에 이른다.
“선생님! 제가 조금만 더 나이가 들었다면 아이들을 제가 키우고 싶어요.”
“안돼! 너는 아직 피지 못한 꽃봉오리야. 내가 어떻게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를 꺾을 수 있겠 느냐, 너는 우리 집안의 또 한명의 딸이고 내 여동생이야, 열심히 공부해서 네가 원하는 대학도 가고 꿈을 이루거라.”
충남 홍성군 홍동면 팔괘리에는 ‘풀무학교’라고 불리는 작고 건물 외관도 초라한 고등공민학교(중학 과정)가 있었다. 초가지붕에 흙바닥인 이 학교에서는 오전엔 공부를 하고 오후엔 농사위주의 실습을 많이 했다. 군청소재지에 있는 공립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똥통학교’라고 놀려댔지만 나는 이 학교에라도 보내 달라고 여러날 아버지를 졸라댔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10리길을 꼬마친구 넷이서 입학원서를 사러갔던 감동이 지금도 아련하다. 이 초라한 학교에서 선생님과 나의 인연의 끈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채규철 선생님은 3대째 내려오는 기독교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어 아버지의 목회를 이어받으라는 부담을 주었다. 그러나 목사 사택에서 자란 어린시절이 선생님에겐 다른 꿈을 꾸게했다. 농대에서 수의학을 전공하여 농촌운동의 발판으로 삼기위해 수의사가 되었다.
선생님은 이 학교에서 영어와 생물을 가르쳤다. 남학생들에겐 축산업에 많은 관심을 갖게했고, 특히 병아리를 부화시켜 각 가정에 나눠 키우게도 했다. 내가 입학 했을 때 선생님은 갓난아기를 둔 부부교사였다. 부인 조 선생님은 가정 과목과 2학년 수학을 가르쳤다.
어느 생물시간에 전교생을 학교 뒷산 묘지마당에 불러모아놓고 죽은 송아지를 해부해서 설명하실 때 우리들은 놀랍고도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다른 선생님의 결강시간에 우리 반에 들어오신 선생님은 영어교과서 위주가 아니라 문학작품 속 인물 이야기와 꽃 이름 속에 담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어 수업시간을 재미있게 이끌어 주셨다. 상급반 학생들은 만학도가 많아서 선생님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때론 부담도 되었지만 이상적인 농촌개혁운동을 하며 미래를 꿈꾸는 친구같은 사이면서 희망의 전도자였다.
학교 근처 선생님의 신혼 방은 ‘보름밤 모임’, ‘독서모임’ 등, 학생들의 모임방으로 방바닥엔 흙, 먼지로 깨끗할 수가 없었다.
“그땐 우리가 참 눈치도 없었지, 조 선생님은 얼마나 불편했을까?”
선배들은 자주 당시의 철없던 우리들을 이야기하며 선생님을 기억했다. 선생님은 체육 시간이나 소풍 때 학생들과 격의 없이 놀아주었고 노래 부르는 음성이 너무나 멋있어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특히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으시면 백만불짜리라고 했다. “형님 목소리는 청중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어!”하고 목사인 동생까지도 부러워했다.
오후 실습시간엔 주로 고등부 교사를 신축하기 위해 전교생이 동원되었다. 학교 앞 냇가에 말려둔 벽돌을 한 장 한 장 머리에 이고 나르는 일부터…. 그때 난 흙을 그릇에 퍼 담기 위해 등을 구부려 고개를 숙이는 순간, 삽으로 퍼 올리는 남학생과의 엇박자로 미간을 찍혔다. 담임선생님은 사색이 되어 피 흘리는 나를 업고 뛰어야했다. 다행히도 10여분 거리에 조그만 외과 의원이 있어 대여섯 바늘을 꿰맸다. 요즈음 같았으면 큰 뉴스거리 였을텐데 하마터면 눈을 다칠 뻔 했는데 더 큰 화를 면한 걸 부모님은 다행으로 여겼다. 오후 작업시간이 힘은 들었지만 우리들의 배움터를 마련한다는 뿌듯함에 큰 보람을 느꼈다.
현재 풀무학교는 우리 때와는 다르게 특수학교로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기독교를 바탕으로 ‘위대한 평민 을 길러내자’는 설립자 정신을 이어받아 입시위주가 아닌 지역사회를 위해 일할 사람을 양성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고등부는 농업기술고등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아 올해(2012)도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선택된 신입생 25명이 입학하게 되었다.
한때는 경쟁이 심한 대도시에서 학교생활을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의 피난처 역할을 해서 선생님들의 고민이 깊어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외국학교 생활 경험자들과 풀무학교의 교육이념을 이해하는 부모님들과 학생들, 사회적인 여러 변화의 물결에 힘입어 지금은 특별한 대안학교가 되었다. 건물은 초라하지만 현대적 시설에 전원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기숙학교가 되었다.
2학년 여름방학을 끝으로 선생님 내외를 뵐 수가 없었다. 나는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었다.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이 가정방문까지 하셔서 아버지를 설득 했지만 허사였다.
“우리 동네에서 여자로서 중학교 졸업한 사람은 너 하나뿐이다. 남들이 흉본다. 네 동생들도 가르쳐야 되지 않니!”
나는 엄마 아버지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검정고시에 합격해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나는 어떻게든 길을 찾고 싶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순자와 춘희가 겨울방학을 맞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그간의 학교생활 이야기와 함께 나의 고민 해결사로 찾아 온 것이다. 덴마크 유학을 다녀오신 채규철 선생님은 풀무학교에 다시 오셨지만 사모님인 조 선생님의 건강 때문에 부산 부모님과 함께 생활 하신단다. 조 선생님께서 “나의 제자 중에 우리가정에 와서 가사 일을 도와주면 진학시켜주겠다.”는 공문을 학교에 보내왔고, 교사회의와 친구들의 추천에 의해 나의 생각을 들으러 온 것이다. 부모님은 말리진 못하셨다. 목회자 가정이라는 점과 선생님의 인품을 믿고 내가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정희 하부 요망” 이라는 전갈을 받고 부산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목사님 사택에서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시는 선생님 내외분은 참 행복해 보였다. 조 선생님은 어린 제자가 객지 생활에 어려움이 있을 것을 예견해 선생님의 친구들 중에도 부모님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공부해서 대학교 교수까지 되신 분의 성공담도 들려주셨다.
그 이듬해 (1968년)9월 15일 선생님은 둘째 아들을 출산했다. 엄마가 결핵을 앓고 있어서 엄마와 아기는 병동을 달리해서 한달 간이나 입원해 있으면서 아기는 분유로 키워지고, 엄마는 산후조리를 하고 퇴원했다. 퇴원해서도 얼마간 산모와 아기를 격리시켜 생활하라는 병원 측의 권유에 따라 신생아는 할머니와 내가 목사님 사택에서 키우기로 하고 선생님 내외는 낙동강변의 김해에 전셋집을 얻어 나가셨다.선생님은 도시와 농촌이 너무 멀지않은 곳에 정착해서 제2의 꿈을 펼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비운이 밀려오는 것을 어느 누가 예견 할 수 있었을까?
10월 31일 들판엔 벼들이 누렇게 익어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고 하늘은 화창했다. 동승한 고아원 승용차엔 운전자를 포함한 직원과 선생님 네 분이 탑승했다. 그런데 고아원 방바닥을 칠하기 위한 신나 1통이 실려 있었던 것이 화마와 함께 큰 사고를 불러왔다. 차가 경사가 심한 언덕길을 달리다 운전미숙으로 10미터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 엔진에 불이 붙은 것이다. 동승했던 두 분은 하룻밤을 못 넘기고 운명을 달리 했고 운전자와 선생님만 살아나셨다.
31세의 꿈 많은 청년 선생님이 교통사고로 큰 화상을 입었다. 전신에 50%의 3도 화상, 거기다 얼굴에 제일 심한 화상을 입어 사회생활에 치명타를 입혔다. 어린 아이들은 귀신 같다하고 아가씨들은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비명을 지르고 도망갔다. 일반적으로 나병환자로 오인 받는 것은 예사였다.
이 집안의 비극적 운명의 한복판에 미지의 세계를 꿈꾸던 시골처녀 ‘나’가 떠밀려와 있었다. 선생님은 회복 마지막 단계에 원주기독병원에서 피부이식과 성형수술을 하기위해 입원 중이었고, 사모님은 마포의 친정에 머물면서 병원을 드나들었다.
1970년 5월 어느 날, 사모님은 부산에 있는 아이들이 염려되어 제자인 내게 고맙다는 안부와 함께 아이들을 잘 돌봐주기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곤 아이들에게 보낼 선물을 사러 나섰다가 길에서 각혈을 하고 쓰러져 운명을 달리했다.
이때부터 선생님은 서울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힘겹게 생활하던 아들의 홀로서기를 돕기 위해 나와 부산에서 살던 할머니는 서울로 가셨다. 어린 두 손자와 그 큰 살림을 나에게 맡기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할머니는 방학동안만 내가 서울로 가서 선생님을 보필하기를 권유하셨다. 집안 분위기는 차가운 냉기가 흐르고 나는 어떤 말도 선생님과 나눌 수 없었다. 식사와 빨래와 의안을 소독해서 끼워주는 일, 화상으로 인한 피부의 당김과 피 터진 자리에 화상연고를 듬뿍 발라주는 일 외에는….
사고 전 선생님은 부산에서 3군데 대학에 시간 강사로 활동하시면서 장기려 박사님과 청십자 의료협동조합 일을 하셨다. 그때는 현재와 같은 국민의료보험이 시행되기 전이었다. 이일을 서울에서도 시작하고 계셨다. 불편한 몸이지만 일에 대한 열정은 그칠 줄 몰랐다. 사람들의 냉대와 수모를 참아내면서도….
그러는 동안 주변에서는 채 선생이 빨리 재혼해야 될텐데 하면서 걱정을 했다. 간호사들 중에 연민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집에 초대도 하고 만남도 가져보고….
2학기 개학을 일주일 남기고 선생님은 연배의 예쁜 여성 한 분을 모시고 왔다. 그 분은 한쪽 팔과 한쪽 다리에 장애가 있는 병원 전도사였다. 나와 함께 한방을 쓰게 되었는데 그 분은 세수할 때도 나의 도움이 필요했다. 내가 개학해서 내려가면 선생님과 나이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선배 언니가 와서 선생님 재혼 때까지 보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다 큰 처녀 제자와 단둘이 한집에 살기가 거북해서 윤리적 견제를 위해서 전도사님과 함께 생활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개학준비를 하는 나와, 교대할 제자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는 선생님과 어떤 불안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개학하기 5일전, 선생님은 술에 약간 취해 들어오셨다. 선생님의 재혼에 관해 질문했고 돌아가신 사모님에 대한 회한을 털어놓으셨다. 돈이 없어 결핵을 앓던 부인을 치료해 주지 못한 아픔과 바나나가 먹고 싶다고 한 것을 실컷 사 주지 못한 슬픈 이야기도 했다. 그리곤 〈아나벨리〉로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비밀스런 속마음을 들킨 후 부산에 내려간 나와 선생님의 마음속엔 서로 고민과 설렘이 자라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의 모든 생각과 계획은 선생님과 연관 지어졌고 화상으로 일그러진 선생님의 피부에 발라주던 화상연고는 보고픔에 대한 선생님의 체취가 되어있었다. 내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잘하고 있으라던 선생님도 나에 대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제자와는 절대로 연을 맺지 않겠다고 견제하고 다짐했지만 주변에 있던 선생님의 선배나 지인들은 사고 전 이미 선생님의 가정사를 속속들이 알고있는 나를 선택하게 했다.
1972년 3월 31일, 아주 특별한 결혼식이 올려졌다. 신랑 측에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신부였으나 신부 측에서는 결코 축하해 줄 수 없는 기쁘고도 슬픈 결혼식이었다. 노랗게 개나리가 피고 화창한 봄날이었는데 갑자기 진눈깨비와 바람으로 인해 날씨는 추운 겨울 같았다. 함석헌 선생님이 축사를 하시다 한참동안 한손으로 입을 가리는 바람에 침묵이 흘렀다. “오늘 이 변덕스런 날씨처럼 이들의 앞날에 또 얼마나 많은 도전이 필요할지” 하시며 앞일을 걱정하셨다. 우리 가족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정릉에 있는 크리스천 하우스에서 하룻밤 신혼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선생님의 친구들이 저녁식사를 하기위해 모여 있었다. 축배를 들기도 전에 초대하지 않은 낯선 사람이 선생님을 모셔갔다. 친구들이 돌아가고 열한시쯤 그 낯선 두 사람은 우리 집 작은방에서 묵게 되었다. 선생님은 누군지도 알려주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집에 걸려오는 전화를 감시했고 어머니와 나의 바깥출입을 감시했다.
3일째 되던 날 새벽 4시쯤 선생님은 잠자는 나를 깨워 간단한 짐을 챙겨 서울탈출을 시도했다. 너무 일찍 나와서 고속버스도 기차도 첫차를 타려면 1시간을 기다려야했다. 불안한 나는 선생님 얼굴이 너무나 특이해서 수배령이 내리면 어느 역에든 쉽게 붙잡힐 것이니 택시로 가자고 요청했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안개 낀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우리는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 하였다. 철없는 신부는 선생님과 함께라서 두렵지 않았다. 천안에서 홍성까지 기차를 연결해서 타고 고향집에 도착하니 부모님들은 깜짝 놀랐다. 소식 없이 내려온 것과 동네 사람들의 눈총이 부담되었을 것이다. 그간의 상황을 선생님은 나에게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들은 정보부 직원들이었다. 결혼식장에도 그들이 참석 했었단다.
그때 우리 신혼집은 신촌 봉원동에 있는 ‘퀘이커 하우스’였는데 회원들이 2년씩 돌아가며 관리하는 집이었다. 일요일엔 함석헌 선생님의 주관 하에 말씀도 듣고 명상을 하는 모임 장소이자 예배장소였다.
함석헌 선생님을 따르는 민주화 청년들과 정부에서 주목하는 대학생들도 많이 드나들었다. 이미 전부터 함 선생님은 정보부 요원들이 가는 곳 마다 따라다닐 때였다. 정보부 직원이 우리집에 온 건 김지하 시인의 수배령 때문이라 했다. 며칠 전 우리 집에 다녀간 후로 행방을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선생님은 그들의 당번 교대 시간을 틈타 며칠만 홍성에 내려가 있으면 서울에서 모종의 거사가 이루어 질 거라고 했다. 4일후 서울역에 도착 하자마자 집에 전화를 하니 어머니가 아닌 정보부 요원이 먼저 받았다. “채 선생, 어디 갔었소? 그러면 우리가 채 선생을 더 의심하지 않겠소!” 그날 밤 우리 신혼부부는 남산에 있는 정보부 사무실 나무 의자에서 날밤을 보냈다. 선생님은 이화여자 대학생들과 대질심문을 한다고 다른 방으로 불려갔고, 나는 커다란 테이블에 수북이 쌓여있는 책가방을 보면서 취조 당하고 있는 여학생들을 염려했다. 간간히 지르는 비명 소리에 움찔 움찔 하면서 밤을 새웠다. 나한테는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고 군용 담요 한 장을 건냈다. 이튿날 아침 군인 막사 같은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요란한 싸이렌 소리와 함께 우리는 풀려났다. 김지하 씨가 붙잡혀 온 그 시간에.
김지하의 시〈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다섯 종류의 도적이라고 풍자한 것으로 1970년 5월 《사상계》에 발표한 것이다. 그는 이 시를 통해서 위에 거론한 다섯 종류의 도적이 저지르는 부정과 부패 탐욕 등을 신랄하게 비판 하였고 특히 다섯 도적을 표현 하는데 한자를 사용 하였는데 글자 한자 마다 개견(犬)자가 들어가는 풍자의 극치를 이룬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펜은 칼 보다 무섭다'는 의미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그 시절에도 시인 김지하가 수배를 받고 쫓기던 신세였던 걸 보면 3공화국 정부도 시도 때도 없이 독재 정부를 비판하는 그가 눈엣가시처럼 보였나 보다.
결혼 후 많은 질문을 받았다. “어떻게 저런 사람과 결혼할 수 있었냐?” 고. 어떤 이는 손가락을 머리 위로 올려 빙글 빙글 돌리면서 “정신이상 아니야?” 하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그땐 너무 순진 했어요” 라고 대답했다. 어느 누구에게도〈아나벨리〉때문이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산골에서 자란 어린 나는 대도시에 나가 꿈을 키우리라는 희망만큼이나 두려움에 대한 도전도 컸던 것 같다.
그때 그 현장에서 〈아나벨리〉를 듣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