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하순 어느 날, 가로등 불빛이 거리에 내려앉는 어스름 저녁, 가을은 무르익어 가로수는 각자의 단풍 옷을 입고, 성질 급한 놈은 벌써 떨켜 층을 만들어 모체인 나무와 이별을 하며 거리에 수북이 쌓여 바람에 나뒹굴며 쓰레기 더미처럼 인간의 발아래 짓밟히고 있다.
그날, 6시 30분에 약속이 있었는데 꾸물거리다가 시간이 임박해서야 급하게 야탑 광장을 향해 빠른 걸음을 재촉하며 걸어갔다. 주차한 곳에서 광장 쪽을 향해 가자면 골목을 거쳐 가야 하는데 내게 익숙한 길이라 가까운 골목을 선택했다. 중앙통로에는 수령이 얼마 안 된 느티나무 가로수가 있다.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에는 야외용 파란색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으며 누구나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 제공되어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저기에 앉아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어 봐야지’ 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날도 남자들이 테이블에 4~5명씩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직관적으로 회색빛 골목 안 기운이 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얼굴과 복장은 초췌해 보였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무표정하고 심각해 보였다.
나는 그들 앞을 지나 광장 쪽을 향해가다 나도 모르게 땅바닥에 눈길이 쏠렸다.
‘피다!’ 갑자기 온몸이 섬뜩해지며 심장박동 수가 빨라짐을 느꼈다. 땅바닥에는 여기저기 피가 떨어져 있었고 초저녁 가로등 불빛에 선홍색을 띤 핏빛은 불빛이 파고들어 더욱 붉게 보였다. 나의 시선은 뚝 뚝 땅에 도장을 찍은 핏방울만을 주시하며 발걸음을 떼어 놓고 있었다. 붉은 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몸은 긴장되었고 호흡이 나도 모르게 점점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몇 발자국을 전진하였고 내 시선은 땅바닥과 주변 환경을 빠르게 움직이며 하나하나 사진을 찍는 한편 머릿속 영상필름도 돌아가고 있었다. 발 바로 앞에 내 머리통만큼 쏟아져 있는 피가 짙은 선홍색을 띠고 있었다. 선홍색의 피에 가로등 불빛이 내려와 반짝이게 코팅을 하고 있었다. ‘저것이 피가 아니라면’이란 생각이 드는 순간 착각을 할 정도로 불빛에 비친 피는 내 눈에 유리 공예처럼 보였다. 나의 시선은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P 나이트클럽과 경륜장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앞에서 소주를 마시는 사람과 지나가는 사람 모두 옆에서 일어난 사건은 관심도 없었으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술을 마시며 자기들만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내게는 익숙한 이 길이 오늘은 낯선 도시처럼 느껴지고 어리둥절해하는 나만 혼자 이방인이 되어 있는 듯했다. 그들의 테이블 위에는 술병이 쓰러져 있었고 땅바닥에는 깨어진 병 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앞을 보니 경찰관 세 명이 한 남자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서 있었다. 앉아 있는 남자의 손바닥에는 손 전화만한 유리 조각이 박혀 있었고 한 경찰관이 그 남자의 손에 물을 부어주고 있었다. 그 남자는 사고를 낸 것인지 당한 것인지는 모르나 골목 안 피의 주인임이 틀림없었다. 남자의 얼굴에서는 술기운 때문인지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은 보이질 않았다. 과연 ‘저 남자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피가 철철 나오고 유리조각이 손에 박힌 고통은 고통도 아닌듯한 표정으로 땅바닥에 앉아 유리조각이 박힌 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푸른 테이블을 운데 두고 앉은 사람들 그들은 경륜장을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 삶의 한 시점에서 만난 사람들! 고통을 나누지도 나눌 수도 없는 그런 사람들! 그들은 본인의 삶이 더 급급하여 남의 아픔을 아파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술을 마시던 일행들이였지만 한 명도 다친 남자를 안타까워하지도 않고 모른 척 술만 마시고 있었다.
나 또한 이런 끔찍한 사고현장을 뒤로 한 채 친구와의 약속 시각 때문에 머릿속에 잔상만을 입력하고는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골목을 빠져나갔다. 모른 척하고 그곳을 지나쳐온 내 마음의 양심은 이미 도망가고 없는 듯하였다. 짧은 거리였지만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그런 느낌 이였다.
야탑 광장에서 친구를 만나 방금 지나온 골목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런데 조금 전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다친 남자와 경찰관이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땅바닥에 피만이 찐득거리는 조청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여전히 푸른 테이블에 둘러앉은 마네킹 같은 사람들은 편의점에서 산 듯한 과자 부스러기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 앞을 친구와 지나가며 그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겹겹이 쌓인 주름과 검은 피부색에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표정들이었다. 초저녁 어둠은 깊어 가고 주름의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의 가로등과 주변의 식당가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만이 그들의 얼굴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들은 각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아버지들이었다.
친구와 그들 앞에 있는 횟집으로 들어갔다. 그동안에는 별다른 생각 없이 이 거리를 다니며 음식점에도 들어갔으나 그날은 왠지 마음이 씁쓸하고 우울한 그런 기분으로 들어갔다. 횟집 안은 방금 지나온 바깥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푸짐한 안주들은 테이블이 모자랄 정도로 꽉 채워졌다. 이렇듯 횟집 안 사람들은 안주를 놓을 자리가 없어 접시를 치워가며 먹어야 할 정도였고 피부 또한 하얗고 고왔다. 주름도 눈에 잘 띄지 않는 밝은 표정과 생기 있고 활기차 보였으며 그들의 언쟁 또한 토론처럼 보였다. 식당 안 사람들은 각자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횟집 안은 시끌벅적였다.
그러나 나는 앞에 앉은 친구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내 머릿속은 골목 안 거리로 달려 나갔고 어느새 그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두 시간여 친구와 함께했던 자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어둠의 색이 짙어 졌으며 가로등 불빛은 가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푸른색 야외용 둥근 테이블 위에는 그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와 빈 소주병만 버려진 채로 있었다.
휘청거리는 바람은 느티나무잎을 날리고 있었고 어느 골목에서 날아온 것인지 은행잎과 중국 단풍잎도 뒤섞여 이 골목을 배회하며 생을 마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