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둥지요, 꿈의 안식처!
오포 문형산 중산간 해발 250미터의 퉁점골. 그리고 이곳을 밑돌아 받쳐주는 아랫마을 동막골. 문형산 품안의 퉁점은 동막의 지붕이요, 동 막은 퉁점의 기둥이다.
퉁점과 동막은 마주보고 오가며, 오르락내리락 형제처럼 정겹다. 아랫마을 동막이 있기에 나의 안식처 퉁점의 순수는 아직도 감동이 머문다. 온갖 세상 잡사를 소화하고 막아주는 동막은 퉁점의 관문이다. 문형산 밑 외딴 퉁점은 한적한 은둔지이나, 동막의 나날은 분주 다망한 생활 전선이다. 밀려오는 세태와 타협하고 도심(都心)을 지향하는 다양한 모습으로 일몰이 무시되는 동막. 동막이 있기에 퉁점의 고요는 살아있고, 산촌 그대로의 신선한 정취도 인정도 한가로이 평화롭다.
퉁점이 전통적 보수적 정감이 감도는 산촌이라면, 동막은 현실적 진취적 기운이 살아 움직이는 신흥도시이다. 퉁점은 점잖은 형이요, 동막은 활달한 아우에 비견된다. 문형산을 동쪽으로 형제의 뿌리는 같으나 의식은 판이하다. 자연, 삶의 모습과 정서도 다르다. 두 곳에서 바라보는 새벽 풍광과 하루의 시작인 동트기 또한 서로 다르다.
퉁점의 동트기는 한 폭의 명화(名畵)요, 동막은 기상나팔이다. 그러나 이 서로 다름이 서로를 지향하고 존중하며 상생(相生)의 조화를 이뤄낸다. 요즈막 몹시 안타까운 것은 빠른 시대의 흐름을 타고 동막의 거센 바람이 퉁점의 변화를 재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곳 퉁점골을 나는 좋아한다. 아니 10여년 살다 보니 이젠 '사랑한다' 말하고 싶다. 이곳의 수수한 자연과 소박한 인정에 푹 빠져버린 듯 행복하다. 물론 더 아름답고 멋진 삶터가 많겠으나 내게는 내 것이 있다. 특히 신비스런 동트기와 고아(高雅)한 아침을 사랑한다. 삼림 사이로 펼쳐지는 아침 햇살은 배추씨만한 추함도 허락하지 않는다. 어딘들 아침 정경이 언짢겠는가? 그렇지만 사람마다 독특한 정서가 애착의 정도를 가늠하기 마련이다. 퍼뜩 생각한다. 태고의 비경을 퉁점골 새벽 동트기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장쾌하고 찬란한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일찌감치 부지런을 떨어 산야보다 훨씬 먼저 깨어 있어야 한다. 새벽잠이 부실한 내게는 제격이다. 언제나 뒤척이며 새벽 어둠을 가르는 이 시간이 지리하다. 온갖 상념으로 이른 봄 3월의 밤이 길게 느껴짐은 나이 탓이리라. 여명(黎明)이 확연히 두리번거리면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을 수 없다. 거뭇한 숲 속에서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Demeter)가 기지개를 한껏 켜고 기상나팔을 불어댄다. 피아니시모로 시작된 동트기는 크레셴도로 어둠을 서서히 벗겨 낸다.
마침내 힘차고 빛나는 장대한 일출!
마법사 태양은 환상교향악에 맞춰 태고의 신비를 연출한다. 창백하게 별들이 사라지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먼동이 코발트색 감격을 안고 솟아오른다.
산마루로부터 피어 내리는 오색영롱한 빛의 향연. 어둠의 잔해가 서서히 걷히면서 솟아오르는 은빛 줄기의 금빛 너울거림. 크고 작은 등성이로부터 골짝이 숲 속을 헤치며 실개천 따라 마을 까지... 온 산야를 소생 시킨다. 잠자는 음지를 깨우며 번져나가는 햇살이 눈부시다. 종횡무진 춤추는 빛의 오케스트라! 백남준 아트의 연출장인가, 곡신(谷神)들의 놀이터인가? 산촌의 아침 향연은 해님 손으로 채색되어 절정을 이룬다.
퉁점골 동트기 축제!
혼자만의 축제이나 감동은 온 누리를 감싸 안는다. 누구나 함께하면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퉁점의 새벽은 매일 매일이 새로운 작품으로 밝아 온다. 오늘의 동트기는 내일 볼 수 없고 내일은 내일 만의 아름다움으로 펼쳐진다. 여기에 계절의 별미가 조화(造化)를 이루니 작은 산촌만의 축제로는 너무나 아깝다.
천지신명이 철따라 재창조할 때 특별히 퉁점의 동트기를 신명나게 그려내지 않았을까. 더욱이 백설이 마을과 산야를 뒤덮을 땐 나의 실존을 의심한다. 별유천지! 이곳에 어떻게 내가... '무아경(無我境)'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철따라 독특한 향기 가득한 산촌은 최고의 걸작을 선사한다.
드디어 동막까지 환히 밝았다. 짙은 안개 속 동막은 퉁점을 닮으려나 속살을 감추고 올망졸망 지붕라인이 파도를 이룬다. 아랫마을 동막골이 안개로 가득할 때 퉁점골은 항상 해맑은 아침이다. 고루한 일상이 거미줄처럼 치열한 차안(此岸)의 동막. 무욕의 텅빈 가슴으로 맞는 피안(彼岸)의 세계 퉁점. 속세와 천상이 합일하려나... 솜털 안개가 몰려오고 있다. 아랫마을 동막 입구에 서리던 안개는 매년 조금씩 동진하여 퉁점골 입구까지 점령하고 말았다.
병든 파도와 같이 조금씩 몰려오는 안개를 보면서 해맑은 퉁점의 아침도 그 수명을 다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떻든 지금의 퉁점과 동막의 아름다운 이 아침을 사랑한다. 자연이 주는 귀한 선물. 환상의 새벽과 찬란한 아침은 이 곳의 귀품(貴品)이다.
자연이 주는 힘!
생기 가득한 하루의 시작이 터질 듯 힘차다. 방금 끝낸 동트기 여운을 음미하며 동막을 바라보고 오늘 할 일을 추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