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는 스키장을 즐겨 찾았으나, 이젠 추위를 피해 건강을 지켜야하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 크다. 겨울을 즐기던 때가 그립다.
금년도 예년과 같이 성탄절을 보내고, 제주도에서 한 달 정도 지내 기로 했다. 일종의 피한(避寒) 여행인 셈이다. 추위를 피해 여행 하자면 동남아나 하와이 정도가 좋으련만 굳이 제주도를 택한 까닭이 아쉽다. 금전 문제였다. 제주도 보다 더 따뜻하고 경관 좋은 곳은 얼마든지 있지만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아내는 겨울 냄새만 나면 추위와 싸울 준비를 한다. 온몸의 관절 통증으로 견디기 어려워하니 정말 보기가 딱하다. 삼십대 초반 산후 조리에 문제가 있어 동장군을 제일 무서워하게 됐으니 백약이 무효이다.
승용차로 전남 보성군 율포 해수욕장까지 내려갔다. 12월 말인데도 그곳은 바람만 차가울 뿐 만산이 가을 분위기이다.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해수욕탕에 몸을 눕히니 승차 피로가 단숨에 가셔 버린다.
다음날 아침, 장흥 노력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은 비교적 순하게 파도를 가르며 제주 성산포항에 닻을 내렸다. 여전히 그곳은 해외에 간 듯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끝없는 검푸른 바다, 아스라이 우뚝 솟은 한라산, 장쾌하다 기괴함이 감도는 성산 일출봉, 따스한 햇살아래 종려나무 가로수가 이국 풍정을 물씬 풍겼다.
예약대로 중문 교우 집 이어도펜션에 짐을 풀었다. 바람은 세게 부나 한낮 기온은 섭씨10도 내외로 따뜻했다. 이튿날 계획대로 롯데호텔 휘트니스 클럽에서 1개월 회원권을 끊고 주로 거기서 매일 3,4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날씨가 좋아지면 간간이 테마별 볼거리를 찾기도 했다. 아내가 만족스럽게 시설을 이용하고 몸도 적응이 빠르게 되니 다행이었다.
클럽 사우나에서 한라산을 좋아한다는 사람을 만났다. 서울 쌍문동에 살다가 3년 전에 제주 한림으로 이사해 살고 있다고 했다. 이 사람은 부부가 함께 한라산 등산 왔다가 아름다운 한라산에 반하여 이듬해 이사 했다고 한다. 한리산 예찬이 끊이질 않았다. 그는 조선조의 지리지 "여지승람"에 의하면 "漢拏者 以雲漢 可拏引也" 라 하여, 즉 '한라' 라는 이름은 은하수를 만질 수 있다는 뜻으로 옛부터 한라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은 '한라산'에는 '하늘산' 이란 원래의 뜻이 숨어 있다고 한다. 한라산에 흠뻑 취해있는 그를 보며 겨울 한라산의 모습이 더욱 궁금해 졌다.
10여 년 전 돈내코 코스로 윗세오름까지 올라가 한라산 남서쪽의 아름다운 경관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기대했던 백록담은 볼 수 없어 실망이 컸다. 이렇게 힘들게 올라갔는데 정상을 못 보고 돌아 서야하니 몹시 안타깝고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휴식년 코스 정보를 미리 챙기지 못한 내 불찰이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백록담을 코앞에 두고도 오르지 못하고 하산하는 길은 지옥이었다. 7월 말이라 몹시 덥기도 하고 왕복 14키로 등산로를 8시간이나 걸었으니 한라산의 아름다움 보다 힘들었던 기억이 더 컸다.
그 후 세월이 흘러도 백록담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은 지울 수 없었다. 매일 휘트니스 클럽에 드나드는 것도 지루하던 차에 한라산 등산을 준비하며 적당한 날씨를 기다리기로 했다. 가끔 제주 방송에 등반사고가 보도되어 약간은 긴장되었으나 날씨만 웬만하면 자신 있었다. 해발 1950미터의 한라산은 윗부분과 아래 부분의 기온과 풍속의 차도 심하고 일기변화도 예측할 수 없어 자칫 낭패를 보기 쉽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 백록담 정복을 꼭 이루고 한라산의 진풍경을 가슴에 담고 말리라.
저녁마다 TV 일기 예보를 유심히 보고 등산 날짜를 잡았다. 겨울의 한가운데인 1월 15일 아침 8시 승용차를 몰고 성판악으로 달렸다. 성판악 코스와 관음사 코스만이 백록담을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성판악 주차장은 이미 만차가 되어 도로변에 주차시킬 수밖에 없었다. 평일인데도 성판악 휴게소는 차량과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등산하기 좋은 날씨가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아이젠을 등산화에 부착시키고 점심과 물병 등을 넣은 배낭을 짊어졌다. 한손엔 스틱으로 몸의 균형을 잡으며 눈길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코끝을 스치는 찬바람이 오히려 신명나게 길을 인도했다. 며칠 전 내린 폭설로 한라산은 온통 설국, 광활한 눈 꽃밭이 장엄한 감동 그 자체였다. 어디를 둘러봐도 하얀 침묵에 바람 소리만이 허공을 가르고 산자락을 휘감는다. 빠드득 빠드득 눈길을 씹으며 걷는 등산 대열. 비장한 모습으로 전투대형을 바로잡는 용맹한 군인들의 행군을 연상하게 했다. 40여 분을 걸었나,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려 뺨을 적시고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즐거운 등산 행렬이 아니라 고행의 진군이었다.
2시간을 걸어 11시 30분에 진달래 대피소에 당도했다. 널따란 고원에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은빛 찬란한 설원! 그러나 왁자지껄 등산객이 붐벼대니 금시 취흥이 사라져버렸다. 이 대피소에서는 12시가 넘으면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를 막고 하산을 유도한다. 안전사고 방지를 위해서다. 나도 이 시간을 지키기 위해 쉬지 않고 걸었더니 기진맥진 체력이 바닥 난 듯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뜨끈한 라면을 사먹고 20여 분 쉬면서 체력을 보완했다.
눈길을 또 걸었다. 이젠 경사가 더욱 심해 위험을 느꼈다. 길옆으로 발을 헛디디면 대퇴부까지 눈 속에 빠지곤 했다. 등산 행렬은 점점 지체되어 주변 경관을 살피기도 쉽지 않게 되었다. 이젠 한발 한발, 조심 조심 발길을 옮겨야만 했다. 체력이 다 소진되는 것 같으니 이젠 정신력으로 버텨야만 할 것 같았다. 백록담을 속으로 외치며 신비롭고 아름다운 위용을 그려본다. 위로 올라 갈수록 작은 전나무 주목 그리고 구상나무 눈꽃이 등산객을 위로하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즐길 수 있는 여운도 잠깐이었다.
이제야말로 한 발짝 한 발짝이 천근만근이다 싶더니, 윗길부터는 나무 계단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미끄럼 방지를 위한 시설로 보인다. 테크 계단 길은 안전하기도 하고 걷기도 수월했다. 군데군데 작은 전망대도 있어서 사람들을 비켜서서 산 아래쪽을 조망(眺望)하기도 좋았다. 뒤를 돌아보자 참으로 나를 압도하는 풍경이 광대하게 펼쳐졌다. 이제까지 내가 걸어온 길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설원을 달리는 눈보라와 크고 작은 나무들의 몸부림, 구름과 구름 사이로 달리는 햇빛, 바다와 맞닿은 해안선은 먼 피안(彼岸)의 세계를 엿보는 듯했다. 이제까지 4시간 가까이 걸었던 피로가 볼을 외는 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린다.
힘을 얻어 또 걷기 시작했다.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바람은 더욱 세차 고 한기는 뼈 속까지 파고드는 듯 했다. 드디어 정상이 가까이 보였다. 곧 백록담을 초면하게 된다는 기쁨으로 설레기 시작했다. 겅중겅중 뛰어 정상에 다다랐다. 검은 화구벽으로 둘러싸인 웅장한 백록담이 한 눈에 들어왔다.
가장 엄숙하고 경건한 이 순간.
아! 화구를 둘러싼 범접할 수 없는 검고 우람한 절벽이 회오리바람을 뿜어내고 있었다. 방향을 알 수 없는 질풍노도(疾風怒濤). 바람은 바다에서 태어나지만, 육지에 상륙하여 들판을 지나 오름을 휘감으며 산기슭을 거슬러오를 때 가장 거세고 사나워짐을 몸소 겪어왔다. 이 강건한 바람이 분화구에 담기면서 방향을 잃고 소용돌이치며 용솟음쳤다. 신비스런 기운을 토해내고 있는 분화구. 눈은 오지 않는데도 눈보라를 만들며 이리저리 휘몰아쳤다. 정령들의 겨울 축제장인가, 산신령이 화가 났는가.
자연의 신(神)만이 빚어 낼 수 있는 걸작품. 여기가 신들의 정원, 백록담이다. "신선이 흰 사슴을 타고 놀던 연못"이란 설화가 무색하다. 이렇게 큰 연못을 보지 못했다. 담(潭)이 아니라 호(湖)이다. 지금은 비록 움츠리고 있으나 봄비를 부르며 한여름 우기가 오면 백록호의 위용(威容)은 달라질 것이다.
한참을 멍하니 응시했다. 밑바닥은 물이 얼마나 얼어있는지 눈으로 덮여 있어 가늠하기 어려웠다. 여름 백록담을 상상해 본다. 신선과 흰 사슴이 보고 싶다. 여름에는 그들의 노니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다시 찾아 함께 즐겨 볼 생각이다.
우리나라 남쪽을 지켜내는 영산 한라산.
한라산의 영기서린 백록담은 한민족의 안녕을 돌보는 평화의 화구이며 신성을 지키는 존엄의 상징이기도하다. 신성을 잉태한 서기(瑞氣)는 태평양 해풍을 타고 북으로 육지로 퍼져 한반도를 감싸 돌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삶의 활력을 주고 오늘의 풍요를 살려내지 않았을까?
추위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정상에서의 동서남북, 서쪽은 화구벽이 가리고 있으나 분화구를 북서쪽으로 돌아 내려가다 보면 서쪽의 비양도가 까마득하다. 북쪽의 제주시, 남쪽의 서귀포시 그리고 동쪽의 성산 일출봉이 보였다 숨었다를 반복한다. 정상에서 제주도를 어디나 볼 수 있으니, 제주 땅 어디서나 한라산은 보이게 마련이다.
사방팔방 바다 쪽으로 내려가며 크고 작은 오름의 기기묘묘한 조화! 다산의 기쁨으로 많은 자녀를 품고 있는 자애로운 한라산.
약간은 비탈진 평원과 동글고 둥근 오름이 불규칙하게 기생(寄生)하여 한라산의 풍요와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한라산은 해안선에서부터 정상에 이르는 선(線)이 더욱 아름답다. 각(角)과 직선(直線)이 아닌, 평(平)과 곡선(曲線)의 부드러움을 지니며 정상을 지향한다. 여기에 한라산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숨어있다.
이러한 지형에 각종 수목이 휘감겨 장관(壯觀)을 이룬다. 지금은 눈꽃일색이나 눈옷을 벗으면 온갖 수목과 꽃들이 철 따른 미의 제전. 난대 온대 그리고 한대가 공존하는 한라산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없는 사시사철 아름다움의 보고이다.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 제주도는 한라산이고 한라산은 제주도이다. 한라산은 아름다운가? 한라산은 아름답다, 그리고 엄하고 착하다. 한라산을 즐기고 배우고자한다.
하산길이 가슴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