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문형산을 알게 된 것은 서울에서 1993년 분당으로 이사하여 1년쯤 뒤의 일이다. 아내와 함께 주변 지리도 익힐 겸 주말을 이용해 이곳저곳으로 청정식수를 찾아다니다가 퉁점골을 알아내게 되었다. 이 때 퉁점골에서 바라본 5월 초순의 문형산은 생명력이 활활 넘쳐 약동하는 별유풍경(別有風景), 한폭의 화사한
풍경화였다. 넋을 잃은 듯 문형산 정상을 바라보던 아내가 말했다.
"여보, 한번 올라가 봅시다."
전혀 예상치 않은 말이 아내에게서 나온 것이다. 아내는 20여 년 전부터 심한 허리
디스크를 앓고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문형산 인력권(引力圈)에서 헤어나지 못한 우리 부부. 장시간 보행이 불편했으나 이리 저리 산길을 찾아가며 정상을 향해 한발 한발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냘픈 연두색 온갖 풀들과 작은 야생화 그리고 나무 잎 새순의 향기가 코끝을 상큼하게 자극해 왔다. 갈참나무, 자작나무, 칭칭나무, 단풍나무 등 숲 사이로 이름 크고 작은 생명의 잔치가 소박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도 앙상하고 스산했던 산등성이와, 영영 엄동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골짜기에 솟구치는 생명의 힘! 연초록 새싹이 줄기를 힘겹게 세우고 꽃대를 삐죽이 솟아내는 신비 앞에 그저 경이의 탄식이 있을 뿐이다. 1시간 만에 정상에 다다랐다. 해냈다는 정복감과 성취감으로 맑고도 조촐한 행복을 서로 나누었다. 얼굴과 목 언저리에 마주치는 향긋한 바람이 폐부까지 쾌감을 만끽시키며 살랑댔다.
정상에는 7,8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표석(標石)이 보였다. 표석에는 광주 문화원이
문형산 소갯 글을 다음과 같이 새기고 있었다.
"고려조 말 어느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이 내려와 이곳에 머무르면서 마을
주위의 경치가 하도 아름다워 이 산을 문형산(文衡山)이라 하였다. 문형(文衡)이란
뜻은 대제학의 별칭이다."
참으로 정상에서 내려다 본 주변 경관은 산과 내, 들과 촌락이 한데 어우러져 어디
를 보아도 거침이 없었다. 마치 고공 비행기에서 무심코 내려다 본 아득한 피안의 세계, 무아경(無我境)에서 잡힐듯하다가 사라지는 환상과도 같았다. 그러나 몸을 한 바퀴 돌려 북동쪽을 향하면서 눈에 가시가 걸렸다. 짜증스럽게 눈을 자극하는 아파트 군(群). 저곳에 왜 엄청난 고층 아파트가 자리 잡아야 했는지... 청아한 물가에서 티끌을 본 듯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이곳을 즐겨 찾았던 고려조 대제학이 오늘의 이 모습을 보고도 이 산을 문형산이라 칭했을까?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문형산에 매료된 우리 부부는 계절 불문하고 이 곳 퉁점골을 찾았다. 어떤 마력에 취해있는 것은 아닌지. 이곳은 언제나 우리의 오감(五感)을 새롭게 자극
하여 흠뻑 빠져 버리게 했다. 이곳에서 말없이 오가며 일하는 사람들도 그저 정겹기
만하다. 그들과 짧은 대화에서도 십년지기를 만난 양 꾸밈없이 통하여 편안했다. 자연과 더불어 함께하는 퉁점골 가족들. 문형산과 함께 살아가는 소박한 이들에겐 산은 친구요, 좋은 이웃이다.
산 정상을 소머리로 하여 비스듬히 남쪽을 바라보고 누어있는 듯한 남향 와우형(臥牛形)의 지세는 평화와 태평, 그리고 풍요를 한껏 느끼게 해준다. 이곳의 사람들은 이 산을 안방에서 건넌방 가듯, 자연스럽게 만나며 모든 삶의 애환을 산속에 묻어 풀어버리고 살아간다.
재작년에 칠순을 맞은 김교제씨는 문형산을 자기 생명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문형산이 스러져가는 자기 생명을 일으켜 다시 살 수 있게 해 주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씨는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내고 서울에서 30여년 간 건축업에 종사해 왔다. 그러는 동안 병을 얻어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병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마지막으로 이곳 고향을 찾아 문형산에 자기 건강을 맡긴 것이다.
매일같이 문형산에 올라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로 옮겨 다니며 병에 좋다는 각종 약초와 먹거리를 생식하고 산에서 거의 생활했다. 골짜기마다 샘물을 파놓고 이를
마셨다. 김씨는 두세 달 지나면서 몸에 힘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더 열심히
산행을 했다. 1년여 접어들면서 건강은 기적같이 회복되어 정상을 찾았다. 건강을 되찾은 그는 생계를 위해 다시 서울 일터로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오염된 서울 환경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년도 못되어 건강이 다시 악화되고 말았다. 몸은 활력을 잃고 당뇨병도 깊어만 갔다. 김씨는 또 이곳 문형산을 찾았다. 10여 개월 산사람으로 다시 생활하더니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 되었다. 그는 이제 문형산에서 여생을 마칠 것을 결심하고 문형산지기가 된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김씨를 보고 문형산 박사라고
부른다. 문형산의 지형과 동식물에 대해 물으면 무엇이든지 거침없이 대답한다. 각종
나무와 풀, 이름 모를 야생화,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들, 그리고 초목의 생태까지도 그
는 소상히 알고 있었다. 어느 골짜기에 가면 도토리와 밤이 많고 다래와 으름이 있는지. 산나물과 두릅, 고사리는 어디쯤 많은지. 옹달샘은 어느 골짜기가 좋은지 등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덕분에 나는 문형산을 속속들이 알고 친숙해 지면서 산 본래의 정체적 기품을 맛보게 되었다. 등산로도 자세히 알게 되어 적절히 코스별 산행을 주 4회이상하여 정신과 신체의 건강을 지켜낸다. 특히 중산간 방화선 도로 6킬로미터는 나에게 최적의 조깅 장소이다.
문형산 등산은 퉁점골을 방문하는 친구들에게 필수 코스다. 이들은 하산 후 맥주 한잔으로 목을 축이며 산을 찬양하기에 침이 마른다. 산이 보기보다 그윽하고 요모조모 등산의 재미를 준다며 자주 이용해도 좋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사해야겠다고 말은 많았으나 이사 온 친구는 아직 한사람도 없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산에는 산격(山格)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문형산은 다른 어느 산에서도 감지될 수 없는 특수한 분위기 이상의 정감이 나의 마음에 자리한다. 어느 산에 갔을 때 그 산의 분위기를 누구나 쉽게 말할 수는 있다. 산세를 휘둘러보고 그 산의 느낌을 간단히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산만이 지닌 고유한 품격 같은 것은 쉽게 감지 될 수 없다. 그것은 오랜 동안 그 산과의 체험적 교류 속에서만이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문형산의 격조를 말하라면 아담함 즉 조촐함이라 말하겠다. 단아한 맵시로 깨끗하게 다가오는 문형산. 언제라도 쉽게 친숙할 수 있는 높이와 거칠지 않은 산세. 그렇다고 쉽게 얕잡아 보고 함부로 할 수 없는 기품을 간직한 산. 한번 보면 누구나 안겨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노년을 함께하기에 지극히 적합한 산으로 나의 마음속 깊이 자리 매김한 문형산! 언제나 흔쾌히 맞아주는 문형산이 있기에 나의 인생 종착지 퉁점골은 더욱 소중하고 기쁨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