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가출
김 화순
“아니, 요것들 봐라! 머리에 쇠똥도 안 떨어진 것들이 도망을 나와. 너희들 집 나온 맛 좀 한번 봐라!”
경찰은 두 눈을 부릅뜨며 한 사람씩 불러내어 신상 조사를 하고 돈의 출처를 추궁했다.“너는 무슨 돈 가져왔나!”호되게 다그쳤다.“아~ 아버지가 농암장날 개판 돈 장롱 속에서 훔쳐 왔어요.”금자는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다음 넌!” 콧물을 훌쩍거리며 희자는“점촌 장에 엄마가 옹기 판 돈, 단지 속에 있는 것 가져왔어요.” 옥화는 엄마가 담배조리품팔이로 받은 돈 훔쳤다고 진술했고, 한 친구는 아버지가 나무 판 돈(산판 일한 돈)을 홈쳐왔다고 자백했다. 나는 무서운 아버지가 엄마를 못살게 할 것 같아서 못 가져 나왔다고 했다. 그는“돈도 없이 왜 따라 왔노?”뻔뻔스럽게? 나는“쟤들이 혹시 왕따 시킬까봐 따라 왔어요. 사실은 돈도 벌고 싶었어요. 라고 했다.
모두들 눈물 콧물 훑어 내면서 들릴 듯 말듯 작은 소리로 집으로 보내달라며 싹싹 빌었다.
경찰은 “집에 갈 것을 왜 나왔냐? 너들이 잘못 한 일을 알기나 아냐? 여기서 콩밥 먹고 유치장에서 몇 년 좀 푹~ 썩어봐라! 요것들아.” 경찰은 우리들 앞에서 복순이 뺨을 때렸다. “못된 자식! 네가 주모자군. 미꾸라지 한 마리가 냇물을 흐린다고. 순진한 아이들을 꼬드겨?” 복순이는 아무 말 못하고 물에 빠진 생쥐마냥 떨기만 했다. 우리들은 억장이 무너졌다. 눈앞이 깜깜한 것이 하늘과 땅이 붙어 버릴 것 같았다.
1976년 중 3 여름방학 때였다. 사건의 발단은 복순이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 학교를 중퇴하고 식모살이를 간 그녀가 몇 년 만에 고향에 왔다. 어릴 적엔 삐쩍 말라 보잘것없었던 대구생활에 아주 예뻐져서 오동통한 몸집과 뽀얀 얼굴에 화장까지 살짝 하고 나타났다. 깡촌에 사는 우리들은 도시 티가 흐르는 그녀가 그저 부럽기만 했다. 고작 학교 수업을 파하면 책 보따리 집어던지고 죽어라 일하러 논밭으로 달려가는 처지었으니까.
그날따라 비가 억수같이 와서 들에도 못가고 다섯 명의 친구들이 복순이네 집으로 놀러갔다. “어서 오이라!” 복순이는 애교 넘치는 대구사투리로 처음 보는 센베이 과자를 내놓으며 도시 자랑을 줄줄 늘어놓았다. “얘들아, 이 골짝에서 고생이 많지! 얼마나 대구가 살기 좋은 곳인지 너희들은 모르지? 내가 객지에 살아보니 공부 고까짓 것‘하나’필요 없더라.” 모두들 공부하기 싫은데 잘됐다 싶었다. 그 말에 귀가 솔깃해서 그 자리에서 대구로 따라가기로 모의작당을 했다.
각자 집의 돈을 훔쳐 다음날 신작로 옆 개천다리 밑에서 10시에 만나서 훔쳐온 돈을 복순이에게 다 주었다. 하루에 버스가 두 대밖에 없는 점촌 행 오후버스를 후미진 십리 길을 걸어가서 간신히 타고 점촌터미널에 내렸다. 오후 7시 점촌에서 김천역, 다시 김천역에서 대구로 가는 기차로 갈아탔다. 도시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부모 몰래 집을 나온 것이 불안했다. 우리들은 꾀죄죄하고 촌티가 흘렀다. “야들아, 괘안캤나?” 주위를 살피며 떨고 있는 우리들은 혹시 동네 사람이라도 만날까봐 똘똘 뭉쳐서 덜덜 떨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주위를 살폈다. “괜찮아, 너무 티내지 말고 있어.” 복순이도 속내는 떨고 있는 듯했다.
한참 동안 우리를 눈여겨보던 점잖은 사십 후반의 아저씨가 다가왔다.
“너희들 어디 가니? 대구에 취직하러 가니?”네”“직장은 구해놓고 가는 거니?”“아니요, 그곳에 가서 취직자리를 찾아야지요.”“그래? 잘됐다. 그럼 내가 대구에서 공장을 하는데 우리 공장에 갈래?”“네, 갈게요.”우리는 동시에 오케이를 했다.“와~ 취직하기 디기 쉽네!” 웬 떡이냐며 반가워했고 복순이는 으스대며 “그 봐, 오길 잘했제!” 그 순간 학생이란 신분을 잊고 말았다. 드디어 대구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아저씨를 따라 어느 아담한 한 옥집으로 들어갔다. 언제 연락을 해놨는지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밥상이 들어왔다. 모두들 종일토록 굶었으니 눈치 볼 것 없이 둘러앉아서 깻잎 장아찌, 무말랭이. 콩나물무침. 된장찌개였는데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다음날 아침, 부드러운 아저씨 목소리가 우리의 단잠을 깨웠다.
“얘들아! 어서 일어나 밥 먹고 회사 가야지! 첫 출근 하자.”
“네.” 우리는 서둘러 씩씩하게 따라나섰다.
친구는“야들아, 집 나오길 참 잘했지? 우리가 회사원이 되면 떳떳이 부모님께 연락드리자. 지금부터 돈 벌어야지, 공부는 무슨 공부냐. 안 그렇나?”모두들 맞다 며 키득 거렸다.
신나는 첫 출근!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다.
“어~ 어~ 아뿔싸.” 우리를 데리고 간곳은 파출소였다. 아저씨는 대구 대명동 파출소 소장님이었다. “에그그, 어쩜.” 우린 잡혀도 단단히 붙잡혔다. 그때부터는 온화하기는커녕 일제 순사처럼 무서워졌다. 우리들을 두 명씩 오른팔. 왼팔. 수갑을 채워 유치장에 가두어놓았다.
경찰은 방망이를 바닥에 퉁퉁 치며 위협했다.“너희들 모두 엎드려뻗쳐.” 엉덩이를 힘껏 패고는 철창문을 꽈당 탕 탕 하며 들락거렸다. “쥐새끼만한 것들이 철딱서니 없이 부모들 속을 썩여? 너희들, 뭐가 될래? 이다음에 이런 일이 또 있으면 그때는 영원이 또 쇠고랑 채워 콩 밥 먹일 거다.” 뱃속은 꼬르륵거리고 몸은 지쳐 늘어져있는데 담당경찰은 또 한 번 엄포를 놨다. “야, 너희들은 어딜 가도 전과자들이다. 이 전과자들아!” 그 말은 태어난뒤처음 듣는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경찰은 전화기가 한 대밖에 없는 우리 동네 이장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동네 여식아들, 개장수집 딸. 옹기집 딸.등 여섯 명, 지금 대구 파출소에 와 있심니더. 조사 후 곧 보낼깁니더.”안심 시켰다.
우리는 완전 독 안에 든 쥐였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를 보는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리고서야 수갑을 풀어 주었다.“저 아~들 감방에서 나왔으니 순두부 사 먹여서 보내게”“네, 소장님.”소장님은 풀어주며 뿌듯해 하는 모습이었다.
꼼짝없이 잡힌 몸들이 되어 경찰이 호송하는 대로 기차를 타고 김천, 점촌을 거쳐 다시 문경 가는 마지막 버스를 타고 축 처진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어둠살이 낀 조용하던 산골동네가 발칵 뒤집혔다.“실컷 키워 놨더니만 이놈의 지저바아가 개판돈을 훔쳐 도망을 가? 왜 왔노? 왜? 왜?” 뒷집 금자네 아버지 소리가 유난히 컸다. 친구들 빌며 우는 소리, 아버지들 내지르는 소리, 엄마들이 아버지들 말리는 소리, 도망가는 친구들 아우성, 동네는 난리가 났다.
나는 걱정했던 만큼 그다지 크게 혼내지는 않았다. 천만다행이었다. 다만 여자는 함부로 몸을 돌리면 안 된다고 몸가짐을 잘하라고 하셨다. 외지로 나갈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내보내줄 것이라고 타이르셨다.
그날 이후로 동네 사람들은 “저기 오입좽이들, 도망좽이들 지나간다 ” 라며 일부러 놀려대곤 했다. 오입이라는 말이 원래는 남편이 아내 몰래 다른 여자와 바람피우는 것을 말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타지로 쓸데없이 떠돌면 오입이라고 했었다.
생각해보면 그때가 한참 질풍노도의 사춘기였던 것 같다. 하늘이 서너 평 밖에 안 되는 빠끔한 동네에서 큰 도시, 대구에 대한 알 수 없는 설렘은 첫사랑의 시작처럼 열여섯 우리들의 가슴을 얼마나 뛰게 했던가! 그때 누가 우리의‘고향탈출’을 막을 수 있었을까. 무작정 떠날 수 있었던 우리들의 용기는 가상했다. 우리들이 잃은 것은 없었다. 고마운 소장님을 만났고, 어긋난 길을 가지 않고 부모님 곁으로 무사히 돌아왔으니 운도 좋았다. 그 이후로 도시에 대한 환상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 당시 우리가 저지른 일들을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호되게 엄포를 놓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늦긴 했지만, 얼마 전 혹시나 싶어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으로 강서경찰서에 문의를 해 보았다. 이름도 모르고 대구 대명동만 가지고는 찾을 확률이 희박하다고 했다.
지금쯤 소장님은 팔순이 훨씬 넘었으리라 생각된다. 대명 파출소 소장님이라는 것 밖에 모르는 우리들은 감사의 기억을 늘 가슴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1976년 8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