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벼의 바다
왕 이앤
우리 아버지 세대는 어려운 시대 (1906- 1988)를 사셔서 불행한 세대로 불린다. 대한제국 말기에 태어나 일제와 제2차 대전,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6.25전쟁과 점령지역에서 인민공화국(인공)의 통치, 대한민국 통치로의 복귀를 거치면서 큰 전쟁을 두 번이나 겪었다. 생존을 위해서 국가에 부역한 것도 뒤에 반역으로 몰렸고 국민들은 심한 분열과 갈등 속에서 살았다. 사회의 큰 혼란 속에서 농민들은 오랜 동안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거칠고 어두운 세력들에 의해서 고난을 당하며 영양부족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평소에 점잖으시고 말씀이 없으셨고 별로 웃지도 않으셨다. 웃어야 할 때에는 ‘허’하고 짧게 웃으시고 말았다. 눈은 선해보였으나 항상 수심에 담겨 있었다. 한 번도 몸이 아파서 누워 계시거나 병원 신세를 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셨으나 1988년에 82세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행복한 시절은 농사짓던 때였다. 1960년대 초기까지 지평선이 보이는 김제 만경평야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밤비가 오면 새벽에 나가 논의 물고를 트고 가뭄이 들면 물자세를 돌려 물을 퍼 올렸다. 매일 논에 나가셨고 밀짚모자와 옷자락은 항상 푸른 벼의 물결과 함께 춤추고 있었다. 땅을 뒤집고 모내기, 김매기를 하고 벼를 베고 탈곡을 할 때도 아버지는 항상 그 중심에서 일에 몰두하셨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서해안 간척지에서 측량기사로 경지정리를 하며 돈을 모아 상당한 수의 논마지기를 샀다고 한다. 어머니의 각별한 절약에도 힘입어 논 밭이 늘어났고 큰 형님은 서울에 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해 1950년에 시작된 6.25 동란은 가족에 큰 시련을 가져왔다. 북한군 점령 지역이 되어 삼년간 큰 혼란을 겪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복귀한 후에는 인공 정부에서의 부역 때문에 친척이 감금되었고 아버지는 그를 돕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구명을 위하여 어머니는 김제읍까지의 30리길을 자주 가고 오고 하다가 나이 어린 막내 아들을 잃었고 본인은 과로로 늑막염에 걸려 3년 동안 병원 치료를 받은 후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계속되는 재난으로 아버지는 고리채를 쓰게 되었고 상당한 수의 논마지기를 잃었다. 큰 형님은 대학을 포기하고 19세에 결혼하여 젊은 새댁이 6명 가족의 집안 살림을 맡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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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차입할 때는 50%인 장리(長利)나 100%인 곱빼기 고리채를 이용해야 했는데 급하게 빌릴 때에는 곱빼기를 이용했다. 이 고리채는 봄이나 여름에 쌀 한 가마를 빌리면 가을에 쌀 수확 후 쌀 1.5 가마 또는 2 가마를 갚는 것으로 입도선매라고 불리었다. 연 이자율로 계산하면 위의 이자율보다 훨씬 더 높다. 쌀값은 저렴했고 봄과 여름의 춘궁기에나 급한 때에는 고리채를 얻어야했다. 세금도 부담이었고 금융기관은 이용할 수 없었다.
곡식과 농민의 유일한 자산인 논은 부패한 관리들과 고리채업자들에게 빼앗기는 경우가 많았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사력을 다하여 잡은 고기를 상어 떼가 다 먹어치우는 것과 흡사했다.
미국의 경우 1865년에 남북 전쟁이 끝난 후 링컨 대통령은 국민의 통합을 위해서 전쟁에 패배한 남군과 남부 정부에 협력했던 사람들에 대한 일체의 보복을 금지시켰다. 남부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은 전쟁 후에 남부지역에서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90년이 지난 후 전쟁을 겪은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정치적 관용이 없었다. 점령지역에서는 인공정부가 들어선 후에 정치적, 개인적 보복에 의해 많은 인명 살상과 재산 몰수가 있었고 대한민국 정부의 복귀 후에는 다시 많은 보복이 행해졌다.
어느 날 한 밤중에 내가 잠에서 깨어 보니 내 방에서 여러 명의 어른들이 투전노름을 하고 있었다. 마을에 노름바람이 불어오고 전문 노름꾼들은 상어 떼처럼 몰려와 외로운 아버지를 그 판에 끌어들였다. 겨울에 한가한 농부들에게 노름은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아버지는 여러 번 돈을 잃어 소유하고 있던 논마지기가 바닥났다. 뒤 늦게 샀던 하천 부지의 논조차 뜻밖에 일어난 홍수에 휩쓸려 가버렸다. 아버지는 새로운 부인을 얻으려고 몇 번 노력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아 두 형님 댁에서 거주하셨다.
국내 최대 벼의 바다인 김제 만경 평야에서도 1970년대 전반까지 사람들은 봄 여름 보릿고개에는 보리죽 밀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겨울에도 쌀의 절약을 위해서 밥 속에 보리, 무우, 콩나물 또는 시래기를 넣었다. 보리죽만 먹던 중 어느 여름날 윤기 넘치는 화려한 밀밥이 고봉으로 밥상에 올라와서 모처럼 맛있게 먹었는데 뒤에 씨앗용으로 남겨둔 밀로 밥을 지었다는 말을 들었다.
6.25 전쟁 직후 외국 원조물자가 면 단위의 초등학교와 동네에까지 가끔 내려와서 분유와 과자 등의 배급이 있었다. 분유를 밥 위에 놓고 쩌 먹으면 꿀 맛이었다. 하루는 급우 몇 명과 함께 학교 숙직실 안에 있는 드럼통 두 개에 분유가 가득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분유를 퍼내다가 붙들렸다. 하루 종일 교무실 옆 복도에 꿇어앉아 머리에 선생님들의 꿀밤을 받아야했다. 초등학교 때 우리 반에 멋진 웃옷 원조물자가 하나 배정되었는데 여자 담임선생님이 반장이었던 나에게 주시어 그걸 즐겁게 입고 다녔다.
학교에서 내일은 월사금을 틀림없이 가져와야한다는 선생님의 독촉이 있던 날에는 집에서 조르다가 다음날 아침에는 대문 앞에 서서 돈 달라고 소리치며 양철 대문을 두드려대던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러다가 제풀에 지치면 학교에 갔다. 중학교 때부터 도시에 가서 공부하게 된 후부터는 가족 모두가 힘을 모아 학비를 지원해 주려고 노력했다. 나는 가능한 한 집에 의존하지 않고 학비는 장학금으로, 숙식은 가정교사로 해결하고자 열심히 노력했고 이것이 적중하여 무난히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나는 어느 날 고향의 옛집과 논을 찾아가 이들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 아버지, 어머니 안녕하세요? ” ”저도 잘 있어요.“
“ 하나님, 저희 부모님을 천국으로 이끄시어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