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낙원에서 약혼녀를 도둑맞다
왕 이앤
한국 학생 L은 와이키키 해변 화장실에 들려 사람들과 나란히 서서 소변을 보던 중에 ‘뽕’하고 방구를 꾸었다. 순간 옆에 서 있던 하울리 (백인을 의미는 하와이 말)에게 “I am sorry”하고 말했다. 그는 “오, 이곳이 바로 적절한 곳이지요 (Oh, this is the right place),”라고 답했다. 하와이는 동서 문화가 쉽게 만나고 융합되는 곳이다.
1970년 초에 미국 동서문화 센터 계획으로 늦깎이 학생이 되어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하자 훌라 스커트 아가씨들이 모두에게 화환을 걸어주고 포옹하며 ‘알로하’를 외쳤다. 진한 프로메라이 향기가 콧속을 얼얼하게 하였다. 하와이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자유로운 낙원이다. 날씨가 좋고 나무와 꽃이 우거지고 인종차별이 없어 누구나 주인의식을 가지고 산다. 백인, 폴리네시아인,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등이 융합되어 평화롭게 살며 동양인과 서양인이 결혼하고 살기 좋은 곳이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화산지대라서 뱀 같은 파충류는 물론 모기, 파리 같은 해충도 없다. 자연의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가장 아름다운 모습과 기운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다. 와이키키 해변에는 하얗고 긴 백사장이 끝없이 몰려오는 파도와 합창한다. 해변을 따라 올라가면 산책하기 좋은 카피올라니 공원이 있다. 그 공원 너머로 다이아몬드 모양의 우뚝 솟은 분화구 ‘다이아몬드 헤드’가 보인다.
갑자기 멀리서 돈 호(Don Ho)의 ‘tiny bubbles (작은 거품들), 기타 반주와 합창이 들려온다.
“ Tiny bubbles/ in the wine/ make me happy/make me feel fine/
Tiny bubbles/make me warm all over/with a feeling that I am gonna
love you ’till the end of time./
So here’s to the golden moon/and here’s to the silver sea/and mostly
here’s a toast to you and me................“
(포도주 잔속의 작은 거품들/ 나를 행복하게 하네/ 나를 기분 좋게 하네/ 마지
막 시간까지 너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느낌에/ 작은 거품들은 내 몸 전체를 따뜻
하게 하네/ 자, 금빛 달을 위한 축배를/ 은빛 바다를 위한 축배를/ 무엇보다
너와 나 를 위한 축배를 들자..................)“
오하우 섬 주위를 드라이브하여 보면 어딜 가나 경치가 뛰어나다. 푸른 바다와 끝없이 밀려오는 하얀 파도,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의 장엄한 외침, 긴 백사장, 부드러운 감촉의 바람, 야자수와 남국의 꽃들, 유년기의 가파른 산들이 모두 일품이다. 섬의 어딜 가나 아열대 나무, 하이비스커스와 프로메라이 향기가 진동한다. 가까이에 있는 마우이 섬, 하와이 섬, 카와이 섬도 모두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유혹한다.
‘할레 마노아 (Hale Manoa; 무지개의 집)’ 기숙사 뒤편으로 자주 쌍무지개가 뜨는 산이 있고 기숙사에는 항상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에어컨이 필요 없다. 기분 좋은 바람이 솜털처럼 손과 팔에 가볍게 닿는다. 여름에는 길에 나가도 습기가 없고 그늘 밑은 항상 시원하다. 12월부터 2월까지의 우기에는 지나가는 비도 있지만 곧 구름 뒤에서 반짝이는 해가 얼굴을 내민다. 겨울에는 가끔 찬 물 덩어리가 몰려와서 사람들은 수영은 잠깐하고 썬탠을 오래한다.
잘 익은 선키스트 오렌지 맛이 너무 좋아서 매일 한 꾸러미를 다 먹는 한국학생들도 있었다. 토요일 저녁때가 되면 학교 곳곳에서 음악소리가 들렸고 맥주와 댄스 파티가 열렸다. 아세아·태평양 지역의 각 국가에서 온 많은 학생들이 같은 기숙사에서 살았다. 나는 친구와 함께 중고차를 사서 돌아다녔는데 신호등 앞에서 가끔 엔진시동이 꺼져 몇 번이고 시동을 거느라 진땀을 뺐다.
기숙사에 어느 날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불어왔다. 아침에 일본에서 도착한 한 여성이 여행가방과 구두를 남겨둔 채 슬리퍼만 신고 사라진 것이다. 은행에 예치했던 돈도 인출되었다. 결혼에 반대한 그녀의 부모가 뒤 쫓아와 데려간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엘 다니던 그녀는 이곳에 관광 왔다가 Y를 만났고 급기야는 그와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아예 짐을 꾸려 돌아오기로 한 그녀는 일본으로 귀국했고 그동안 남자는 신혼집을 마련하고 페인트칠도 마쳤다. 그런데 그녀를 공항에서 픽업하여 돌아온 후 그가 수업에 들어간 사이에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Y는 한국의 대학교에서 영어강사 생활을 하다가 이곳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던 중이었다.
일본으로 전화해도 바꿔주지 안했고 편지를 해도 전달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장 일본에 갈 수도 없었다. 항공요금이 매우 비싸기도 했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미국정부 장학금으로 미국에서 공부하는 J (교환 프로그램) 비자를 가진 사람들은 일단 출국하면 재입국 수속이 매우 까다로워 학사계획에 큰 낭패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봉급자 저축으로는 그만한 자금을 마련할 수도 없었다. 매월 초청당국에서 받는 수당으로는 그러한 여행이 무리였고 당국의 허가를 얻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30세에 가까운 나이의 그는 불그스레한 얼굴에 항상 웃는 모습이었다. “달걀을 깨보면 속이 다 똑 같다,” “항상 흥분해 있는 자” 등 동료들은 그를 위로하며 놀려대곤 했다.
작은 기숙사 방에서 약혼녀가 마음의 징표로 남겨둔 가방과 구두를 바라보았을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약혼자와 좋은 옷들과 구두를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대학교 기숙사 방에 남겨두고 온 그녀의 마음은? 부모는 진정으로 딸의 행복을 생각했을까? 청순하고 용감한 그들의 사랑이 생각 짧은 부모에 의해서 짓밟힌 것 아닐까? 한국 사람을 무시한 그녀의 부모에 분노의 감정이 일어났다. 그 남자가 미국인이었어도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1970년대 초에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거리였고 민간 교류도 많지 않았다. 한국은 가난했고 정국은 매우 불안했다. 1959년부터 1984년 사이에 일본정부는 9만 3000명의 조선인들을 북한으로 보냈다. 그 중에는 일본인 배우자들도 있었다. 북한의 과잉선전과 일본정부의 정책이 합해져 이루어진 것으로 대부분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던 그들은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간 것이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일인당 소득은 남한 보다 높았다. 북송된 사람들은 후에 다시 일본에 돌아올 수가 없었다. 또한 1970년대 초의 한국은 유신정부가 들어서기 직전으로 정치적으로도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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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 후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기 때문에 Y에 대한 후일담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이 진실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났을 것이고 사랑의 꽃도 피어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