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의 여인
송하형
뉴스에선 연일 불안한 이집트 정국 사태가 보도되고 있다. 마치 우리나라 1980년대와 닮았다. 뉴스를 접할 때 마다 15여 년 전 처음 밟았던 이집트의 사막 기후나 낙후된 도시 풍경, 그리고 독재 정권을 위한 삼엄한 경비로 경직된 카이로의 첫 인상이 떠오른다. 그 가운데에서도 한 여자에 대한 강렬한 인상은 이 모든 기억을 압도 한다.
1990년대 말 업무 차 이집트의 대 그룹 산하 전선회사를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미팅을 하게 된 본사의 구매 총괄 책임자는 뜻밖에도 여성이었다. 족히 170cm는 돼 보이는 훤칠한 키에 가무잡잡하면서도 매끈한 피부는 멀리서도 뭇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웠다. 커다란 눈과 시원스런 눈썹은 핑크색의 화려한 히잡과 잘 어울려 단아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첫눈에도 클레오파트라의 후예다운 미모와 세련미 그리고 당당함까지 두루 갖춘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그 옛날 로마제국의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가 생각났다. 제아무리 천하의 황제일지라도 경국지색(傾國之色) 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남자 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녀의 이름은 ‘다리아’라고 했다. 무슬림 사회에서 여성이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게다가 국내외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중요 구매 업무를 총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충격이었다. 이 나라 여성들은 보수적일 테니 아무리 내가 타국의‘을’의 지위라 할지라도 나를 무시하지는 않겠지. 막연한 확신을 했다. 게다가 여자들이란 선물에 약하지 않을까? 나는 초기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면서 화장품과 향수 등을 신중히 골라 그녀에게 선물공세를 펼쳤다. 멀리 우리 회사까지 초청하여 VIP로 모셨으며 내가 직접 유명관광지를 안내까지 하면서 정성을 다했다. 앞으로 사업이 잘 진행되리라 철썩 같이 믿었기에 최선을 다해 봉사할 수 있었다. 그녀를 절대 이성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갑’에 대한 의례라 스스로 합리화시키면서 말이다.
그녀는 새침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내 호의를 넙죽넙죽 잘도 받았다. “thank you"라는 가벼운 인사뿐인 것으로 보아 이 또한 일상적인 듯 했다. 하긴 나 같은 이가 어디 한두 명이겠는가? 그래서인지 계속되는 선물공세에도 그녀의 태도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내가 그 곳을 방문해도 호의를 베풀거나 호감을 보이는 것은 고사하고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 한번 바뀌는 일이 없었다. 선물을 사양하지도 않으면서도 부담도 갖지도 않는 듯 했다. 그래도 거래에 있어서만큼은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기대하고 그것으로 위안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몇 차례 더 방문 하였다.
나는 우리 회사 기술력과 일본 및 사우디 등의 유명한 전선회사의 납품실적을 제시하며 신뢰도를 높이는데 주력을 하였다. 그 동안 기술 실무진과도 많은 회의를 한 후 시험 일정을 잡고 샘플을 보내 시험할 기간까지는 대략 2년은 더 걸리리라 예상 했다. 하지만 인내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가운데 다행히 좋은 기술 책임자를 만나 15개월의 지루한 시험과정을 통해 우리의 ‘완전함’은 입증이 되었고 나는 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를 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가격과 지불조건, 납기 등을 매우 까다롭고 깐깐하게 요구하면서 압박을 가해왔다. 나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음은 물론이다. 대량 구매를 내세워 가격을 후려친 후 막상 발주 시에는 절반도 안 되는 물량만 구매하고 대금 지불도 계약 조건과는 다르게 한두 달씩 지연하는 것은 예사였다. 당시 나는 시장 개척이 우선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모든 조건을 받아들였다.
돌이켜보면 그녀는 여성이기 이전에 상인으로 그 유명한 개성상인, 중국, 인도상인 보다 한 수 위라는 전형적인 아랍상인이었던 것이다. 외유내강의 그녀는 겉으로는 소소한 선물에 약한 것처럼 보인 여성이었지만 업무에 있어서는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 못지않은 사람이었다. 샤일록은 평소에 유태인을 무시한 안토니오에 대한 보복차원으로 그랬다지만 다리아는 내게 그럴 이유도 없거니와 그동안 내가 해준 것을 생각한다면 절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래를 중단할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영업이란 게 시작하는 것부터가 어려운데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서 쉽게 포기할 수 없었으며, 일단은 고객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우리 회사의 규모도 커져서 다리아 회사에의 의존도도 낮아졌고, 이집트의 경제 상황과 회사의 재무 건전성도 부실하여 적극적인 영업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그 이후 실무는 직원들에게 위임하고 나는 회사대표로 주요 거래처만 인사차 방문하고 있다. 10년 만에 그녀의 회사를 다시 찾게 되었다. 고객으로 그녀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방문하였다. 그토록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던 그녀는 많이 변했고 신비한 분위기마저 사라진 초로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세월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만한 위력이 있음을 그녀를 통해 절감할 수 있었다.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모습도 문화도 다른 낯선 땅의 신비로운 여자에게 잠시나마 일방적으로 마음을 빼앗겼던 지나간 아름다운 추억 속에 젖곤 한다. 나이가 들어도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 속에서 살고 싶은 때가 있다.
불안한 이집트의 정세가 빨리 안정을 찾기를 바란다. 그리고 중년의 끝을 지나고 있을 다리아도 행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