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빛 유월
이경희
유월이 된 후 부쩍 흐린 아침을 맞이하면서 으레 아침에 일어나면 밖을 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정말 흐리네. 유월이 되긴 됐나 봐.’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게 된다. 잔뜩 회색 안개에 휩싸여 있다가 햇빛에 말라가며 정오쯤 되어서는 빛살을 보여준다. 회색 빛 하늘, 어두운 연두색 나뭇잎, 물기 어린 대기, 몸에 착 감기는 대기의 감촉, 그리고 비 등 전형적인 유월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며 내 기억 속의 유월로 빠져들게 한다.
유월은 완성보다는 미완성, 명랑보다는 우울이 생각난다. 하룻강아지 같이 경쾌하게 팔랑거리던 잎새들도 앎이 늘어가면서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다. 잎새의 크기는 멈췄으나 보다 진한 색을 가꾸는 숙성의 시간을 갖는지 모른다. 유월의 회색 빛 거리는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유행성 알레르기처럼 우울증을 도지게 하는 것 같다. 회색 하늘빛마저 가려 놓은 연두색 잎새들 때문에 가로수 길은 어둠이 군데 군데 스며 있어 모든 걸 가물거리게 한다. 때문에 눈물이 흘러내려도 들킬 염려가 없다.
유월에 대한 나의 인상은 도시에 올라온 후 맞이한 몇 번의 유월이 나에게 각인 된 것 같다. 유월의 농촌은 유월의 색을 눈 여겨 볼 분위기가 되지 못했다. 보리, 밀 타작과 못자리 가꾸기, 모내기 등 한 해 농사의 굵직한 부분들을 유월에 해야 하기 때문에 탈곡기소리, 물소리, 농부들의 농가가 끊이지 않고 인접한 각자의 논에서 서로서로 주고 받는 대화조차도 창가의 한 자락이 되어 분주한 유월에 편승한다. 내가 한 일은 열린 들판을 마음껏 가르고 들꽃 무더기 속에 철푸덕 앉아 둥그런 자국으로 짓이기기가 고작이었다.
스무 살 무렵 도시에서 맞이한 유월은 사뭇 달랐다. 농촌은 깔끔하게 수납할 수 없게 덩치 크고 흙 묻은 농기구와 잡동사니가 집안을 규모 없이 어지르는 가운데 도시는 많은 것들이 말끔하게 포장되고 심지어 사람들의 마음까지 포장되어 반지르르 했다. 도시 뒷골목으로 밀려난 한유한 우울이 내게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게다가 청춘 자체가 한숨이던 시절이기도 하였고 특히 유월의 비는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가라앉게 했다.
비가 왔다. 반 지하 창문은 빛이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는데 비 오는 날은 그마저도 막혀버려 좁은 방엔 어둠을 밝힐 형광등이 찌르륵 끓고 있었다. 찻물 끓는 소리가 가장 활기차고 조금이나마 생기를 돋워주는 듯 했다. 차 한잔 갖고 와서 비 오는 창 밖을 바라본다. 창문은 스크린이 되어 비 오는 모습을 투영했다. 철 창살에 둘러싸인 유리문에는 빗물이 주르륵 길을 내다가 곁가지로 갈라지고 새로운 줄기에 섞여 어지럽게 흘러내리고, 철 창살에 팅팅 부딪치며 경쾌하게, 바닥에 찰프닥 찰프닥 빗방울을 튕기며 계속 비는 내리고 있었다.
우울에 시간을 뺏기기 싫어 우산을 쓰고 거리로 나왔다. 만나자는 연락도 없고 갈 곳도 마땅찮아 도서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얼마 후 뒤에서 뛰어 오는 소리가 나는가 싶었다. 나는 여전히 우산 밑에 또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었는데 내 신발 옆에 다른 신발이 나타났고 한발 앞서 가로 막혔다. 순간 옆을 돌아 보았더니 검은 뿔 테 안경을 낀 어떤 남학생이 서 있는 것이었다. 머뭇거리며 머리를 긁적이며 “혹시 시간 있어요? 차 한잔 해요.” 이러는 거였다.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다가 빼버린 것처럼 낭만 속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듯 했다. 내게는 무척 생경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내게도 사랑이 찾아 올까요?’ 하며 아련한 사랑을 꿈꾸고 있던 나는 배경음악이 사라진 무미건조한 사건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스무 살의 호기심은 일었으나 난 “할 일이 너무 많아 바빠서요.” 하고 말았다. 법을 공부한다고 소개를 하고 한사코 내 옆에 나란히 걸으며 말을 걸어 왔지만 나는 도서관 건물 속으로 들어가며 그를 가벼운 목례로 떠나 보내야 했다.
바람이 일고 연두색 잎새들이 은빛 뒷면을 보이며 흔들리더니 곧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날도 텅 빈 마음에 혼자만의 대화로 채우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앞에 다다랐을 때 가로수 스피커에선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처럼 경쾌하면서도 씩씩하고 담담했다. 우울함에 대한 카타르시스. 빗속에서 춤추고 싶은 충동. 소나기 내린 후 산뜻함이 느껴졌다. “raindrops, falling on my head, one thing, I know, blue, crying, happiness, nothing’s worrying me” 같은 단어가 얼핏 들려왔다. 내 얘기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BJ Thomas의 <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 > 였다.
빗방울이 내 머리 위에 계속 떨어져요 /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빗방울이 계속 떨어져요 / 난 해에게 말했어요
졸면서 일하는 태도가 맘에 안든다고 / 계속 빗방울이 떨어져요
그러나 내가 아는 한가지는 / 아무리 나를 우울하게 하여도 나를 이길 순 없다는 것
머잖아 행복이 다가와 나를 기쁘게 해줄 거예요 / 비가 계속 내려요
그래도 슬퍼하진 않을 거예요 / 우는 건 내게 어울리지 않거든요
불평한다고 비가 그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 나는 자유로우니까 어떤 것도 나를 걱정시킬순 없어요/
머잖아 행복이 다가와 나를 기쁘게 할 거예요 (후략)
매년 유월이 찾아오고 유월에 대한 기억이 어느 해인가 잊혀진 채 유월이라는 하나의 추상어로 집적되어간다. 내 의식의 저편에서 유월에 해당하는 저편에서 우울함과 감미로움이란 수식어로 함께 어우러져 놓여 있음을 발견한다.
유월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렇게 우울하게 감미롭게 유월의 분위기에 취해있다가 7월 쨍쨍한 태양 아래로 나갈 일이 걱정이다. 너무 민망하지 않을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