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카드]
나는 매주 중학생들과 전화로 얘기를 나눈다. 학습과 관련된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던 중에 한 아이가 학생부에 가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다. 반 친구 중에 왕따인 학생이 있는데, 자신을 포함한 친구들이 그 대상이 되어 선생님에게 불려갔다는 것이다. 자신들만 그런 것도 아니고 반 아이 대부분이 그랬다며 속상해하는 것이다.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는 것도 억울하지만 부모님도 학교로 불려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징계가 내려질지 모른다고 하소연했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보다 다른 아이도 모두 그랬는데 왜 자기들만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억울해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 얘기를 들으며 중학교 시절의 한 친구가 떠올랐다.
같은 반이었던 그 친구의 이름은 대성, 초등학교 때부터 문제아로 유명했다. 반 친구들을 통해 알음알음 들리는 소문으로는 불량모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시골에서 자란 남자아이 같은 거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소문 때문인지 아니면 인상 때문인지 반 아이들은 대성이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듯했다. 누구도 그 친구와 친해지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앞뒤로 앉은 아이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수업태도가 그다지 나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얌전한 편이었다. 소문만 없었다면 아주 평범하게 친구들과 어울리며 학교생활을 즐겁게 할 수도 있었다.
대성이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건 대성이와 친한 친구가 학교 내에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친구도 문제아로 찍히기는 했지만 대성이처럼 소문은 크게 나지 않은 듯했다. 대성이는 가끔 결석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대성이가 언제부터 학교를 나오지 않게 될까를 궁금해 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아이들 사이에서 대성이의 가출에 관련된 얘기들이 떠돌았다. 지금은 주변에서 흔히 들리는 얘기지만, 그 당시에 가출은 큰 사건이자 문제아의 증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얘기가 무색할 정도로 대성이는 하루나 이틀 후에는 반드시 학교에 나왔다.
2학기가 시작되고 10월쯤엔가 반 내에서 자리 이동이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얘기를 나눌 필요가 없던 대성이의 앞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키가 커서 뒤에 앉아야 했지만 시력이 나쁜 탓에 앞으로 옮기다 보니 하필이면 대성이 앞이었다. 가능하면 다른 자리로 옮기고 싶었다. 대성이는 수업시간에 자주 나의 등을 찌르며 지우개나 연필, 자와 같은 것들을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그때마다 아무 말 없이 물건들을 빌려주었다. 수업이 재미가 없을 때도 등을 쿡 찌르면서 짧은 얘기를 시켰지만, 소문 때문이었는지 귀찮음 때문이었는지 간단하게 답하며 거의 무시하다시피 했다.
12월 중순에 있는 미술수업은 크리스마스카드 만들기였다. 준비물은 가을에 주워놓았던 예쁜 모양의 낙엽들과 물감이었다. 도화지를 카드모양으로 오려 10장 정도를 한곳에 쌓아두고 책상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신문지를 깔았다. 카드모양의 도화지 하나에 낙엽을 올려놓고 그 위로 물감을 뿌려주었다. 빨강, 파랑, 초록, 보라 등 여러 가지 색깔의 물감들이 카드마다 다양한 모양의 낙엽카드를 만들었다. 잠시 물감을 말린 후 낙엽모양으로 남은 가운데의 빈 공간에 감동적인 글귀나 시를 적으면 카드가 완성되었다. 반 아이들이 모두 그런 방식으로 카드를 만들었다.
방학식을 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우리들은 자신들이 만든 카드를 서로에게 건네며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들 중 누구도 대성이에게 카드를 건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던 그 친구도 카드를 만들기는 했지만 그냥 그런 미술시간의 수업일 뿐이었다. 대성이가 나에게 카드를 주었을 때 너무 놀랐었다. 내 뒤에 앉아서 나를 괴롭힌다고만 생각했던 그 친구를 좋게 대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귀찮아서 필요한 것을 빌려주고 짧게 할 말만 했을 뿐이었다. 내게 건네진 대성이의 카드를 보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카드를 펼치니 그곳에는 짧은 인사말이 적혀있었다. 종례시간이 지나고 대성이를 찾았지만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아쉬움을 남긴 채 우리가 함께 한 1년은 끝나고 있었다.
2학년이 되자 반이 바뀌면서 그 친구와는 헤어지게 되었다. 계속 기억에 남아있던 대성이는 개학한지 몇 달 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렇게 대성이는 내 삶 속에서 안타까움과 미안함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인상이나 평판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내가 어릴 적에 느꼈던 왕따의 분위기와 지금 내게 얘기하는 중학생 아이의 경우는 많이 다를 수도 있지만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기본 전제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와 친구들은 대성이에게 확인되지 않은 소문과 우리들 사이에 형성된 분위기로 인해 일종의 폭력을 가한 것이었다. 왕따가 되어 친구들을 선생님에게 일러바쳐서 곤란하게 한 그 친구들은 어쩌면 왕따인 학생이 제일 친해지고 싶은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왕따 가해자가 되어 학생부에 불려가서 문제를 일으킨 중학생 아이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들 사이에 형성된 이기심과 무신경함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 아이가 좀 더 시야를 넓혀서 다른 사람의 생각까지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럴지는 의문이다. 그나마 학교라서 나은 상황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그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에서 이와 비슷한 일을 당하게 되면 어디 호소할 곳도 제대로 없으니 말이다.
대성이도 분명 자신을 피하는 반 친구들의 행동을 알고 있었다. 원인이 자신이라 생각해도 많이 억울하고 화도 났을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도 학교에 나오고 싶은 상황은 아니지만 그 친구는 한 해 동안 꾸준히 잘 나왔다. 그것만이라도 칭찬해줘야 하는 것일까.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눈앞을 가득 채운다. 조금씩 색깔을 내는 나무들을 보면서 문득 그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졌다.